중국 윈난성 미러(Mile)의 한 계곡, 유칼립투스 숲 사이로 다크 그레이 슬레이트 지붕을 뒤집어쓴 건물 여러 채가 흩어져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묵고 쉬어 가는 중국 스테이이자 스파지만, 처음 설계도에 적힌 용도는 아티스트 작업실이었다.
짓는 도중에 용도가 바뀐 건물은 대개 어딘가 어색하다. 작업실로 짠 방에 욕조를 들이고 화실을 명상실로 돌리면 이음매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Red Valley Dwellings는 큰 공사 없이 용도를 갈아탔다. 설계를 맡은 line+ studio가 처음부터 ‘무엇을 하는 방’보다 ‘어떤 순서로 머무는 곳’을 그렸기 때문이다.

홍토와 유칼립투스 숲, 미러의 계곡에 내려앉다
미러는 윈난성 훙허 하니족·이족 자치주에 속한 작은 도시다. 윈난 중부 도시권과 남부 소수민족 문화권을 잇는 길목에 있고, 최근 몇 년 사이 예술가 마을과 문화시설이 하나둘 들어서며 예술 마을로 얼굴을 바꾸는 중이다.
대지는 그 중심인 Dongfengyun 예술 타운 서쪽 계곡이다. 땅이 온통 레드 톤 홍토(紅土)라 이름도 ‘레드 밸리’가 됐다. line+ studio는 바로 이 동네에 아트센터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 뒤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온 셈이다. 대지는 200평 남짓한 좁은 경사지다. 여기에 숲과 함께 사는 작은 건축군을 앉히는 게 과제였다.

하니족 ‘버섯집’에서 빌려 온 건 모양이 아니라 비례
지붕의 출처는 훙허 지역 하니족 전통 마을의 ‘버섯집(蘑菇房)’이다. 흙을 다져 쌓은 벽 위에 초가지붕을 얹은 집으로, 벽은 땅 쪽으로 넓게 버티고 지붕은 위로 갈수록 오므라들며 버섯 갓 같은 실루엣을 만든다.
설계팀은 이 모양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 ‘아래는 퍼지고 위는 모이는’ 비례만 뽑아내 훨씬 단순한 기하학으로 바꿨다. 그래서 완성된 매스는 민속촌 재현품이라기보다 땅에서 솟아오른 조각에 가깝다. 사다리꼴로 깎은 지붕 덩어리가 레드 톤 벽 위에 묵직하게 얹힌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어딘가 오래된 집처럼 읽힌다.
전통을 인용하는 방법 중에 이게 가장 세련된 축이다. 형태를 복제하면 테마파크가 되지만, 비례를 가져오면 낯설면서도 익숙한 건물이 된다.

한 덩어리 대신 여러 동으로 쪼갠 경사지 스테이
땅은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좁은 대지 안에서 높낮이가 꽤 분명하게 갈린다는 얘기다. 이런 땅에 건물 하나를 크게 얹으려면 경사를 깎아내거나 거대한 기단을 세워야 한다.
line+는 프로그램을 여러 개의 작은 동으로 나눠 경사를 따라 한 칸씩 내려 앉혔다. 건물과 마당이 산세를 타고 동쪽으로 번져 나가니, 덩치가 숲의 나무 스케일과 엇비슷해진다. 멀리서 보면 리조트 한 채라기보다 숲속의 작은 마을이다. 집을 여러 채로 흩어 마을처럼 만든 시도는 앞서 소개한 〈한 집인데 마을처럼 흩어졌다, House of Cluster〉와 〈산비탈에 조각조각 흩어놓은 집, Rancho del Bosque〉에서도 볼 수 있다.

높은 곳으로 들어와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동선
동선도 지형이 정했다. 입구는 가장 높은 서쪽 끝에 있다. 지붕 덮인 회랑을 지나 대지에 들어서면 높이차를 따라 가운데 중정으로 내려가고, 거기서 높이가 제각각인 동들로 갈라져 들어간다.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다섯 개 레벨이 경사에 맞물려 있고, 1층에는 동과 동을 잇는 다리도 걸렸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바깥에서 안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하늘이 좁아지고 공기가 조용해지는 순서다. 사람은 계단을 내려갈 때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살핀다. 입구에서 탕까지 이어지는 이 하강은 도시의 속도를 한 겹씩 벗겨 내는 의식에 가깝다. 스파 손님에게 이 내리막은 그 자체로 마음의 감속 장치가 된다.

방보다 먼저 설계된 중정
이 건축군의 뼈대는 방이 아니라 중정이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회랑과 통로로 면을 이어, 안과 밖, 공용과 개인의 경계를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었다.
설계팀이 내세운 원칙도 여기서 나온다. 특정 기능에 맞춰 과하게 맞춤 제작하지 말고 구조와 스케일을 바탕으로 삼을 것, 중정과 복도로 끊김 없는 면을 만들 것, 고정된 구역 대신 공간의 위계로 질서를 잡을 것. ‘주방은 여기, 침실은 저기’로 나누는 대신 ‘마당에서 몇 걸음, 몇 계단 떨어져 있는가’로 공간의 성격이 정해지는 식이다.
덕분에 방 이름이 바뀌어도 건물의 질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유연함은 머지않아 실제로 시험대에 오른다.

아티스트 작업실은 어떻게 스파가 됐나
설계는 2020년에 시작됐다. 발주처가 처음 요구한 건 여러 작가가 함께 쓰는 레지던시였다. 각자 머물며 작업하다가도 필요하면 다 같이 모여 교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공사가 몇 해 이어지는 사이, 2023년에 운영 방향이 웰니스 쪽으로 틀어졌다. 결국 2024년 Muxin Valley Spa Center(沐心谷SPA)라는 이름의 대중 스파로 문을 열었다.
작업실이 치유 공간으로, 사적인 공간이 반쯤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는데도 건물은 큰 수술을 받지 않았다. 지금 명상실에는 싱잉볼과 라탄 방석이 놓여 있다.
생각해 보면 두 용도는 의외로 가깝다. 작가에게 필요한 건 바깥 소음이 걸러진 집중이고, 스파 손님에게 필요한 건 바깥 일상이 걸러진 휴식이다. 둘 다 ‘세상과 적당히 떨어진 안쪽’을 원한다. 설계 단계에서 용도가 확정되지 않고 운영 사정에 따라 계속 바뀌는 일은 요즘 어디서나 흔하다. 설계팀이 이 건물을 ‘한 번에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계속 고쳐 쓸 수 있는 열린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창을 줄여 빛을 가두는 ‘빛의 수납함’
윈난은 고원이다. 해발이 높아 햇빛이 세고 곧장 내리꽂힌다. 요즘 휴양 건축은 통유리로 경계를 지우고 풍경을 통째로 들이는 쪽이 대세지만, line+는 반대로 갔다. 두꺼운 벽, 작게 뚫은 구멍, 위에서 떨어지는 천창으로 빛의 양을 조절해 건물이 ‘덩어리’로서 존재감을 갖게 했다.
설계팀은 이 방들을 ‘빛의 수납함’이라 부른다. 두꺼운 벽 속에 깊이 박힌 창은 조각칼로 파낸 구멍 같고, 하루 동안 빛이 실내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표정을 바꾼다.
통유리 상자 안에서 사람은 늘 어딘가에 노출돼 있다. 반대로 사방이 막히고 빛이 한 줄기로만 들어오는 방에서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모이고 몸이 먼저 긴장을 푼다. 환경심리학에서 말하는 ‘조망과 은신(prospect-refuge)’ 가운데 은신 쪽 감각이다. 스파라는 새 용도가 이 건물에 유난히 잘 맞는 건 이 때문이다.

욕조에 앉으면 풍경이 액자가 된다
창을 아낀 대신 위치는 정교하게 골랐다. 욕조 앞에는 가로로 길게 낸 창 하나가 있는데, 몸을 담그고 앉으면 딱 눈높이에 숲과 이웃 동의 슬레이트 지붕이 걸린다. 벽 전체를 유리로 텄다면 이런 집중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보여줄 것만 골라 잘라낸 풍경은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다.
지붕 위로 불쑥 튀어나온 유리 상자도 같은 계산이다. 어두운 목재로 감싼 좁은 복도를 지나 끝의 유리 상자에 서면 시야가 한꺼번에 계곡 쪽으로 열린다. 어둠을 지나 빛으로 나오는 순서가 풍경의 극적 효과를 두 배로 키운다.

어둑한 실내를 완성하는 웜톤 간접조명
창이 작으니 조명이 해야 할 일이 많다. 사진 속 조명은 거의 전부 ‘광원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쪽이다. 목재로 마감한 경사 천장 가장자리에 숨긴 간접조명이 천장 면을 은은하게 쓸어 올리고, 테이블마다 낮은 테이블 램프가 놓였다. 라운지와 다이닝에는 라탄을 엮은 큼직한 펜던트가 걸렸고, 티 바 선반에는 칸마다 라인 조명이, 욕실 세면대 옆에는 세로로 긴 라인 조명이 들어갔다. 색온도는 하나같이 따뜻한 쪽이다.
조명 설계의 기본은 전반(앰비언트)·국부(태스크)·연출(액센트) 세 겹을 겹쳐 까는 것이다. 이 건물은 천장 간접조명이 전반을, 테이블 램프와 펜던트가 국부를, 선반과 벽의 라인 조명이 연출을 맡아 세 겹이 고루 깔렸다. 2700~3000K 웜톤은 몸을 휴식 모드로 돌리고, 짙은 목재와 다크 그레이 마감은 빛을 먹어 같은 밝기라도 더 아늑하게 읽힌다. 스파에 꼭 맞는 세팅인 셈이다.
집에서 이 분위기를 빌리고 싶다면 순서가 있다. 먼저 천장 직부등 대신 커튼박스나 몰딩 위에 LED 라인을 숨겨 천장을 간접으로 밝힌다. 다음으로 소파 옆과 식탁 위에 눈높이보다 낮은 조명을 하나씩 더한다. 전구는 2700K로 바꾸고 가능하면 디머를 단다. 어두운 마감이 많은 집일수록 광원 수는 늘리고 하나하나의 밝기는 낮추는 쪽이 낫다.

슬레이트 지붕, 레드 톤 벽, 화산석의 재료 조합
재료는 여러 차례 시험을 거쳐 정해졌다. 처음엔 전통 초가를 잇는다는 뜻에서 불에 강하고 썩지 않게 처리한 블랙 짚 지붕을 검토했다. 결국 내구성과 유지 관리 비용을 따져 400×200mm 다크 그레이 슬레이트 기와로 바꿨다. 색과 결이 조금씩 다른 슬레이트를 겹겹이 이어 붙여, 빛이 바뀔 때마다 지붕 면에 잔잔한 결이 일렁인다.
외벽은 주변 홍토와 이어지는 레드 톤 텍스처 도장으로 마감했고, 일부 옹벽은 윈난 현지에서 나는 레드 톤 화산석을 쌓아 만들었다. 문과 창 둘레는 블랙 메탈로 가늘게 테를 둘러, 거친 돌·흙빛 벽과 날렵한 금속이 대비를 이룬다. 수영장 옆과 지붕 아래에는 내화벽돌을 성기게 쌓은 격자 벽이 바람과 시선을 반쯤 걸러낸다.
주택에 이 조합을 들인다면 핵심은 비율이다. 묵직한 지붕재와 흙빛 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블랙 메탈은 창틀 정도의 가는 선으로만 등장해야 거친 재료들이 오히려 정돈돼 보인다.

숲속에 조용히 묻히는 쪽을 택한 건축
해가 지면 이 건물들은 지붕 아래 가는 띠창과 유리 상자로만 빛을 흘린다. 낮에도 밤에도 계곡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리드 아키텍트 Meng Fanhao는 건축이 자연 속에 놓인 오브제가 아니라 땅과 시간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경계를 지우기보다 절제되고 조용한 힘으로, 빛과 숲 사이에 스스로의 내부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2020년 첫 스케치에서 2024년 개장까지, 그 사이 용도가 한 번 통째로 바뀌었다. 그래도 이 건축군은 처음 그린 비례와 마당과 작은 창을 그대로 지켰고, 그 덕에 레지던시였어도 스파여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 됐다. 언젠가 또 다른 용도가 찾아와도, 이 계곡의 버섯 지붕들은 별말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