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없는 유치원,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

유치원 건축에서 복도를 통째로 지워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는 같은 크기의 교실을 긴 복도에 줄줄이 꿰어 놓는 익숙한 학교 평면을 버리고,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의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골라 돌아다니는 ‘아이 키에 맞춘 작은 도시’를 만들었다.

설계는 요하네스버그에서 교육 공간을 주로 다뤄 온 Hubo Studio가 맡았다. 출발점은 뜻밖에도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였다. 2024년 문을 연 이 유치원은 이듬해 세계건축축제(WAF) 2025에서 VELUX가 후원하는 자연광 부문 상(Best Use of Natural Light)을 받았다. 아이를 믿는다는 말을 평면으로 그리면 어떤 모양이 되는지, 이 건물이 꽤 구체적인 답을 내놓는다.

놀이터와 정원으로 둘러싸인 요하네스버그 유치원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 전경
© Elsa Young Photography

요하네스버그 주택가에 들어선 아이들의 마을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는 요하네스버그 북쪽 샌튼(Sandton)의 모닝사이드(Morningside)에 있다. 사립학교 Redhill School 캠퍼스 안에 새로 지은 유아 교육동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레드 기와를 얹은 주택들과 그린 지붕을 인 기존 학교 건물 사이에 화이트와 핑크의 둥근 매스가 끼어 앉아 있고, 그 둘레를 놀이터와 정원이 겹겹이 감싼다.

연면적은 2,641m², 최대 370명의 아이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숫자만 들으면 제법 큰 건물인데 막상 사진 속 모습은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 가깝다. 덩치를 감추고 아이 눈높이로 몸을 낮추는 것, 이 건물이 노린 첫인상이 바로 그거다.

그네 놀이터 너머로 보이는 아치창 유치원 외관
© Iwan Baan

땅에 반쯤 몸을 묻은 유치원 외관

아이들은 이 유치원에 올라가는 대신 내려가며 들어간다. 진입로는 슬레이트로 마감한 옹벽 사이를 지나 완만하게 아래로 꺼지고, 건물은 조경 속에 반쯤 잠긴 채 앉아 있다. 주변 주택보다 지붕선이 낮게 깔리니 동네 풍경을 누르지 않고, 아이 입장에서는 비밀 기지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외벽은 그레이 플라스터인데 가까이 보면 표면에 골판지 같은 주름이 잡혀 있다. 아이들이 놀이에 즐겨 쓰는 골판지 상자에서 따온 질감으로, 설계팀이 시공사와 함께 레이저로 깎은 전용 흙손까지 따로 만들어 냈다. 여기에 아치창과 동그란 창이 리듬 있게 뚫려 있어 건물 전체가 커다란 장난감 상자처럼 보인다. 지붕 위로는 핑크 클레이 컬러의 탑 네 개가 솟아 있는데, 이 탑이 이 건물의 평면을 푸는 열쇠다.

슬레이트 옹벽 사이 길로 아이들이 걸어 들어가는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 진입로
© Elsa Young Photography

출발점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설계에 들어가기 전 Hubo Studio는 레지오 에밀리아로 건너가 그 도시가 낳은 유아교육 철학의 뿌리를 직접 공부했다.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도시의 부모들과 교육자 Loris Malaguzzi(로리스 말라구치)가 함께 일군 교육 방식이다. 아이를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지식을 지어 가는 탐구자로 보고, 교사와 부모 다음의 ‘세 번째 교사’로 환경, 즉 공간을 꼽는다.

그래서 레지오 계열 유치원에는 공통된 공간 어휘가 있다. 모두가 모이는 광장(피아차)과 손으로 만들고 실험하는 작업실(아틀리에)이다. Hubo Studio는 이 어휘를 그대로 옮겨 심지 않았다. 요하네스버그의 햇빛과 땅, 도시 특유의 에너지에 맞춰 다시 썼고, 설계팀은 그 결과를 ‘남아프리카식 해석’이라고 부른다. 건축이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배움에 직접 끼어드는 참여자가 된다는 것, 이 프로젝트가 레지오에서 가져온 핵심은 그 한 줄이다.

유리 지붕 아래 둥근 펜던트 조명이 떠 있는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 중앙 광장 The Piazza
© Elsa Young Photography

유리 지붕 아래 광장, The Piazza

건물 한가운데에는 The Piazza라 부르는 광장이 있다. 이탈리아 도시의 광장을 아프리카식으로 다시 해석한 공간으로, 두 개 층이 트인 높이 위에 유리 지붕을 덮었다. 바닥에는 슬레이트가 깔려 있고 나무가 자라며 테이블이 흩어져 있어, 실내인데도 바깥 마당에 나와 앉은 기분이 든다. 홈베이스와 아틀리에가 모두 이 광장을 향해 열린다.

광장 한쪽에는 열린 주방이 붙어 있어 음식 냄새와 요리하는 모습이 광장 안으로 그대로 들어온다. 먹는 일까지 하루의 배움 안으로 끌어안겠다는 배치다. 굽이치는 벽을 타고 오르는 파스텔 모자이크는 현지 작가 Usha Seejarim이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작업이다. 내가 붙인 타일 한 조각이 학교 벽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사실만큼 아이에게 확실한 ‘우리 학교’ 감각도 없다.

위에서 내려다본 유치원 유리 지붕과 네 개의 아틀리에 타워
© Elsa Young Photography

복도를 지운 유치원 평면, 네 개의 수직 아틀리에

위에서 내려다보면 구조가 한눈에 읽힌다. 네모난 건물 가운데에 유리 지붕이 깔려 있고, 그 위로 둥근 모서리의 탑 네 개가 저마다 다른 각도로 비틀린 채 박혀 있다. 이 탑이 수직 아틀리에다. 아틀리에 하나하나에 전문 학습 공간과 계단, 전시와 모임 공간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고, 열여섯 개의 홈베이스(반별 교실)가 이 네 아틀리에를 둘러싸고 배치된다.

1층 평면도를 펼치면 의도가 더 분명해진다. 모서리를 둥글린 방들이 서로 조금씩 어긋난 각도로 광장을 에워싸고, 방과 방 사이의 틈이 곧 길이 된다. 교실 문을 나서면 복도가 아니라 광장이고, 건물 바깥 테두리에는 정원과 놀이 마당이 바로 붙어 있다. 실내의 방, 가운데 광장, 바깥 정원이라는 세 겹이 퍼블릭과 프라이빗의 위계를 대신하는 셈이다. 칸막이 친 방의 연속이 아니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의 네트워크를 만들겠다는 것이 설계팀의 설명이다.

둥근 매스와 브리지가 얽힌 유치원 아트리움
© Elsa Young Photography

교실과 복도의 학교는 어디서 왔나

우리가 아는 학교 평면, 같은 크기의 교실을 긴 복도에 일렬로 꿰어 놓은 형태는 19세기 대중 공교육이 퍼지면서 굳어진 유형이다. 많은 아이를 한꺼번에 관리하고 감독하기에 효율적이었지만, 공장이나 병영의 평면과 닮았다는 비판이 오래 따라다녔다. 유치원(Kindergarten)이라는 말을 만든 독일 교육자 Friedrich Fröbel(프리드리히 프뢰벨)이 그린 ‘아이들의 정원’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20세기 중반부터 건축가들은 이 틀을 깨려 했다. 네덜란드의 Aldo van Eyck은 1960년 완공한 암스테르담 고아원에서 ‘집은 작은 도시 같아야 하고, 도시는 큰 집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작은 돔 지붕이 모인 마을 같은 평면으로 풀었고, 1960년대 이후 Herman Hertzberger는 복도를 아이들이 머물고 노는 ‘학습 거리’로 바꿔 놓았다. Redhill이 스스로를 ‘아이 키에 맞춘 도시’라고 부르는 건 이 계보 위에 서 있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차이가 있다면 도시의 은유를 옆으로 펼치지 않고 위로 쌓았다는 점이다. 광장이라는 마당 위로 브리지와 회랑, 탑이 층층이 겹치며 작은 입체 도시가 된다.

Usha Seejarim의 모자이크가 감싼 유치원 광장 벽면
© Iwan Baan

아이가 길을 고르게 두는 설계, 신뢰

이 유치원에는 정해진 하나의 동선이 없다. 계단이 여러 갈래로 나 있고, 브리지와 회랑이 광장 위를 가로지르며, 곳곳에 이야기 공간과 감각 놀이용 구석, 빛의 방(light room), 옥상정원이 숨어 있다. 같은 목적지라도 아이마다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설계팀은 길을 여러 개 낸 덕분에 혼잡이 줄고, 아이와 교사 모두 어떻게 움직일지 스스로 고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동 자체가 관찰하고, 마주치고, 혼자 해 보는 교육 프로그램이 되는 셈이다.

물론 세 살과 일곱 살이 한 건물에 섞이는 만큼 가장 큰 숙제는 감독이었다. 그래서 공용 공간은 활짝 열어 두되 교사의 시선이 닿게 하고, 동시에 나이에 맞게 숨어들 수 있는 조용한 자리를 곳곳에 남겼다. 창립자 Asher Marcus는 이 수직형 학습 모델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지만, 그 과정에서 ‘신뢰’가 하나의 설계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한다. 앞서 소개한 〈미끄럼틀로 층을 잇는 어린이집, Kinderoase an der TUM〉이 놀이 기구로 층을 묶었다면, 이쪽은 길의 가짓수로 아이에게 선택권을 건넨다.

효율도 챙겼다. 처음 계획안은 4,500m²였는데, 아틀리에를 함께 쓰고 동선을 겹겹이 포개면서 2,641m²까지 줄였다. 설계팀은 이를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친환경 전략으로 꼽는다. Asher Marcus의 표현을 빌리면 학교가 공간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든 결과이고, 덕분에 작게 느껴지지 않으면서 더 효율적인 건물이 됐다.

둥근 테이블과 천창이 있는 유치원 홈베이스 교실
© Elsa Young Photography

홈베이스 교실, 둥근 모서리와 낮은 창의 인테리어

광장에서 한 걸음 들어서면 홈베이스, 반별 교실이다. 천창으로 부드러운 빛이 내려오고, 아치창은 아이 눈높이에 맞춰 낮게 뚫려 있다. 테이블은 직사각형 대신 물결처럼 휘어진 모양이라 아이들이 마주 보고 둘러앉기 좋고, 가구와 벽 모서리는 하나같이 둥글게 깎였다. 교육용 가구와 붙박이 수납은 현지 제작사 Innovation Factory가 만들었다.

마감재 목록에는 리놀륨이 들어 있다. 따뜻한 촉감과 내구성, 쉬운 청소까지 동시에 챙겨야 하는 보육 공간에서 오래 검증된 재료다. 제품 협력사 명단에는 바닥재 브랜드 Tarkett도 이름을 올렸다. 벽은 크림, 바닥은 핑크와 베이지 같은 저채도 컬러로 눌러 둬서 아이들이 벽에 붙인 그림과 작업물이 오히려 공간의 주인공이 된다. 레지오 교실이 아이의 작업을 전시하는 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정확히 맞물리는 선택이다. 집에서 아이 방을 꾸밀 때도 마찬가지다. 가구와 벽을 차분한 톤으로 깔아 두면, 아이 그림 몇 장만 붙여도 방이 금세 아이 것이 된다.

옥상에서 본 유리 지붕과 핑크 아틀리에 타워
© Elsa Young Photography

빛을 재료로 쓴 유치원, 정전에도 수업이 이어진다

Asher Marcus는 이 프로젝트가 ‘빛을 하나의 재료로 다룬다’고 말한다. 하루 동안 빛이 공간의 분위기와 방향감각을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광장 유리 지붕 아래에는 Serge Ferrari 막재로 만든 개폐식 차양이 달려 있어, 요하네스버그의 강한 햇볕을 걸러 내는 동시에 넓은 광장의 소리를 부드럽게 흡수한다. 교실에는 열 굴뚝(heat chimney)을 두고 광장 지붕 아래에 개구부를 내서, 데워진 공기가 위로 빠져나가는 자연 환기를 끌어낸다. 벽체의 열용량(thermal mass)도 실내 온도의 출렁임을 완만하게 붙잡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정을 알고 보면 이 선택이 더 절실하게 읽힌다. 계획 정전(로드 셰딩)이 일상처럼 반복돼 온 나라에서 자연광은 분위기 연출이 아니라 전기가 끊겨도 수업을 이어가게 하는 기능이다. 수상 소식을 전하며 Hubo Studio는 자연광을 정전 중에도 배움을 이어가게 하는 기능이자 분위기를 빚는 재료, 그리고 따뜻함과 안정감을 주는 감정적 요소로 다뤘다고 설명했다. 심사위원단은 빛과 그림자를 섬세하게 조절해 아이들이 머물 자리를 스스로 고를 수 있게 한 점을 높이 샀다. 아이에게 길을 고르게 한 평면이 빛에서도 같은 태도를 지킨 셈이다.

모자이크 벽과 원형 펜던트 조명이 보이는 유치원 광장 2층 회랑
© Elsa Young Photography

공중에 뜬 비눗방울, 구형 펜던트 조명

인공조명도 그냥 지나치기 아깝다. 광장 공중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화이트 구형 펜던트 여러 개가 서로 다른 높이로 떠 있다. 조명은 Steamlight가 맡았다. 빛을 사방으로 고르게 퍼뜨리는 유백색 구형 조명은 눈부심이 적어 아이 시선 가까이 내려와도 부담이 없고, 높이를 달리 매단 덕에 두 개 층이 트인 큰 공간이 휑하지 않고 비눗방울이 떠다니는 장면처럼 채워진다.

조명 설계의 기본은 전반(앰비언트), 국부(태스크), 연출(액센트) 세 겹을 겹쳐 까는 것이다. 이 광장에서는 천창과 차양이 낮 동안의 전반 빛을 맡고, 펜던트 무리가 공간의 리듬과 분위기를 잡는 연출 조명 역할을 한다. 집에 응용한다면 층고가 높은 거실이나 계단실에 구형 펜던트 두세 개를 높이 차를 두고 매달아 보자. 2700~3000K 웜톤 전구를 고르고 디머를 달면 낮에는 오브제, 밤에는 은은한 전반 조명이 된다.

모래 놀이 마당과 원형 창으로 이어지는 유치원 교실
© Elsa Young Photography

슬레이트 벽은 낙서장, 재료가 곧 교구다

재료는 튼튼하고, 손에 닿는 감각이 분명하며, 어린 시절과 이어지는 것으로 골랐다. 가장 재미있는 건 슬레이트다. 바닥과 벽에 깐 슬레이트는 그대로 아이들의 칠판이 돼서, 매일 무언가를 그리고 지운 흔적이 건물 표면에 쌓인다. 여기에 MOSO 대나무의 따뜻한 결, 스틸과 유리의 투명함, 타일과 리놀륨의 내구성을 섞어 균형을 맞췄다.

교실과 모래 놀이 마당 사이 유리벽에는 동그란 창이 뚫려 있어 안과 밖의 아이들이 서로를 들여다보며 논다. 설계팀이 말하는 ‘삼투(osmosis)’, 즉 안과 밖, 놀이와 배움, 개인과 공동체가 경계 없이 스며드는 상태가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아이 방에 옮겨 본다면 벽 한 면만 칠판 페인트나 자석 보드로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려도 되는 벽’ 하나가 방 전체의 쓰임새를 바꾼다.

계단식 잔디 스탠드와 바위가 놓인 유치원 야외 놀이 마당
© Elsa Young Photography

옥상정원부터 계단식 잔디까지, 교실 밖 교실

건물 밖도 배움의 연장이다. 계단식 잔디 스탠드와 큼직한 바위, 디딤돌이 놓인 마당은 놀이터이자 야외 교실이고, 놀이 공간과 시설은 PlayOn이 설계했다. 옥상정원과 빗물을 땅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침투 시설(soakaway), 식재로 덮인 놀이 공간은 빗물을 관리하는 동시에 주변 미기후를 한결 부드럽게 다듬는다.

요즘 유아교육에서 숲 유치원과 바깥 놀이가 다시 주목받는 흐름과 겹쳐 보면, 이 유치원은 숲으로 나가는 대신 도시 한복판에 작은 풍경을 겹겹이 끌어들인 쪽이다. 자연을 교실 안으로 들인 〈산과 바다를 모든 교실에 들인 학교, 베이징사범대학 부속 난산학교〉와 견줘 봐도 재미있다. 아이가 길을 잃어도 괜찮은 건물, 아니 길을 한번 잃어 보라고 슬쩍 등을 떠미는 건물이랄까.

ArchitectsHubo Studio
DesignerUsha Seejarim (모자이크), PlayOn (놀이터)
PhotosElsa Young Photography, Iwan Baan
ContractorAtCor Construction
Category유치원
Country남아프리카공화국
Materials슬레이트, 대나무, 스틸, 유리, 타일, 리놀륨, 플라스터
LocationMorningside, Sandton, Johannesburg
Area연면적 2, 641m²
Year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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