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닝을 구부릴 수 없으니 건물을 구부렸다, The Big Bend

맨해튼 57번가 상공에 거대한 U자가 하나 걸려 있다. 하늘로 올라가던 초고층 타워가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잃은 듯 둥글게 꺾이더니, 그대로 반대편 땅으로 다시 내려온다. 사이에 낀 기존 건물들은 그 아래로 무심하게 깔려 있다. 말굽 같기도 하고, 종이를 접다 만 것 같기도 하다.

2017년 3월 그리스 출신 건축가 Ioannis Oikonomou가 이끄는 oiio architecture studio가 발표한 The Big Bend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겠다는 경쟁이 한창이던 도시에 “높이 말고 길이로 겨루면 어떻겠느냐”고 물은 제안. 9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삽도 뜨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어질 가능성은 사실상 없지만, 이 그림은 이상하게도 계속 돌아온다.

Billionaires Row skyline seen from Central Park
© oiio architecture studio

억만장자의 거리에는 연필이 자란다

이야기의 배경은 Central Park 남쪽 끝, 57th Street 일대다. 2014년 Christian de Portzamparc가 설계한 One57이 미드타운 최초의 초고층(1,000피트 이상) 주거 건물로 올라섰고, 이듬해 Rafael Viñoly Architects의 432 Park Avenue가 그 기록을 다시 넘어섰다. 이후로 이 동네에는 최소 10개의 초고층 프로젝트가 줄줄이 계획됐다. Billionaires’ Row라는 별명이 붙은 게 그때다.

Central Park 잔디밭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늘고 긴 막대들이 스카이라인 위로 삐죽 솟아 있다. 폭에 비해 높이가 지나치게 커서 건물이라기보다 연필이나 자에 가까워 보이는 형태. 여기에는 명확한 계산이 깔려 있다. 층이 높아질수록 공원 조망값이 올라가고, 조망값이 올라갈수록 분양가가 뛴다. 그러니 부지가 좁아도 어떻게든 위로 뽑아 올리는 게 이득이다.

The Big Bend cover drawing by oiio studio
© oiio architecture studio

조닝을 구부릴 수 없다면, 건물을 구부린다

Oikonomou가 문제 삼은 건 그 계산법 자체였다. 뉴욕의 조닝 법규는 대지마다 올릴 수 있는 연면적과 형태를 제한하는데, 개발업자들은 공중권을 사들이고 저층부를 비우는 식의 온갖 우회로를 동원해 그 한도 안에서 높이를 최대치로 끌어낸다. 건축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높이가 곧 위신”이라는 전제 아래 기묘한 기술의 목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던진 반문은 이렇다. 조닝 규칙을 구부리는 대신 구조 자체를 구부리면 어떻게 되는가. 위로 못 가면 옆으로 가고, 옆으로도 못 가면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 된다. 표지 드로잉은 이 발상을 아주 단순하게 정리한다. 검은 배경 위 흰 아치 하나, 창문이 촘촘히 뚫린 두 다리.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이다.

스튜디오는 이 제안을 두고 “맨해튼의 높이 제한에 대한 겸손한 건축적 해법”이라고 적었다. 겸손이라는 단어에는 물론 가시가 들어 있다.

The Big Bend compared with Burj Khalifa and other supertall towers
© oiio architecture studio

1,219m, 세계에서 가장 ‘긴’ 건물

펼쳐 놓았을 때 이 건물의 총 길이는 4,000피트, 미터로 환산하면 약 1,219m다. 스튜디오가 만든 비교 다이어그램이 재미있는 건 이 숫자를 세계 최고층 건물들 옆에 나란히 세워놓았다는 점이다. Burj Khalifa가 2,722피트, Shanghai Tower가 2,073피트, One World Trade Center가 1,792피트. The Big Bend는 그 어느 것보다 길지만, 정작 높이는 절반 수준이다.

기록의 종목을 바꿔버리는 방식이랄까. 아무도 겨루지 않는 항목을 새로 만들면 1등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실제로 구조가 꺾이기 시작하는 지점은 지상 500m 남짓이고, 거기서부터 반원을 그리며 내려온다.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위치는 서로 다른 필지이며 그 사이의 기존 건물들 위를 그대로 넘어간다.

The Big Bend at night over Manhattan skyline
© oiio architecture studio

밤에 보면 더 실감이 난다

낮 이미지에서는 이 구조물이 다소 도면처럼 읽힌다. 밤 렌더링은 다르다. 두 다리를 따라 켜진 수천 개의 창이 아치를 그리며 이어지고, 왼편에는 432 Park Avenue가 저 혼자 창백하게 서 있다. 이 장면에서 The Big Bend는 갑자기 개념이 아니라 물체가 된다.

사실 이 렌더링의 설득력이 프로젝트의 절반이다. 종이 위 아이디어로만 남았다면 건축 매체 한 귀퉁이에서 끝났을 텐데, 실제 스카이라인 사진 위에 이질감 없이 얹힌 이미지 몇 장 덕분에 CNN과 Fortune, Time Out까지 이 제안을 다뤘다. 2017년 봄 며칠간 이 그림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건축 이미지였다.

The Big Bend elevation drawing with neighbouring towers
© oiio architecture studio

옆집 432 Park Avenue를 대놓고 닮았다

입면도를 보면 The Big Bend의 외피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해진다. 정사각형 창을 격자로 반복하는 이 방식은 432 Park Avenue의 얼굴 그 자체다.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부러 흉내 낸 것이다. 비판 대상의 문법을 그대로 빌려 와 형태만 접어버리면, 원본이 얼마나 임의적인 선택이었는지가 드러난다. 432 Park의 격자 창은 그 자체로 유명한 디자인이지만, 결국 좁은 평면에서 최대한의 조망을 뽑아내기 위한 해법이기도 했다. 같은 창을 구부린 벽에 붙여놓으면 조망은 하늘과 땅과 옆 건물 옥상으로 제각각 흩어진다. 어떤 창은 위를 보고, 어떤 창은 아래를 본다.

MULTI ropeless elevator system diagram
© oiio architecture studio

이 건물이 성립하려면 엘리베이터가 옆으로 달려야 한다

구부러진 건물의 진짜 난제는 구조가 아니라 이동이다. 아치의 정점을 지나 반대편 다리로 내려가려면 사람이 수직으로만 움직여서는 안 된다. Oikonomou는 여기서 thyssenkrupp이 개발한 MULTI 시스템을 끌어왔다. 로프 없이 자기부상 방식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로, 여러 대의 케이지가 수직 샤프트와 수평 구간을 오가며 하나의 루프를 순환한다. 원리로만 보면 건물 안을 도는 지하철에 가깝다.

이 기술을 알게 된 것이 The Big Bend의 출발점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순서가 뒤집힌 셈이다. 형태를 먼저 그리고 기술을 찾은 게 아니라, 새 기술이 가능하게 만드는 형태를 상상한 쪽에 가깝다.

다만 이 대목은 9년이 지난 지금 조금 다르게 읽힌다. MULTI는 독일 Rottweil의 시험 타워에서 여전히 검증 단계에 머물러 있고, 실제 완공된 상업 건물에서 이 시스템을 타본 사람은 아직 없다. 미래 기술을 전제로 세운 건물이 그 기술보다 먼저 늙어버린 상황이다.

The Big Bend massing model with 57th Street context
© oiio architecture studio

진짜였다면 정확히 이 자리에 섰다

스튜디오가 만든 백색 매스 모형에는 번호가 붙어 있다. 1번은 One57(1,004피트, 2014년 완공), 2번은 Central Park Tower(1,569피트), 3번은 111 West 57th Street(1,438피트), 5번은 1984년에 지어진 Trump Tower다. 4번은 빈 필지, 6번은 Central Park, 그리고 7번이 The Big Bend다.

위에서 내려다본 컷을 보면 이 U자가 공원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두 다리를 57번가 블록에 박고 있다. 아치의 곡선이 Central Park의 남쪽 경계선을 향해 열려 있고, 그림자는 길게 도심 쪽으로 떨어진다. 제안서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맥락 모형을 만들어둔 건 의도적이다. 실현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농담이 정확히 어느 자리에 대한 농담인지를 못 박아두기 위해서.

Drawing of an empty apartment interior in The Big Bend
© oiio architecture studio

“조용한 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제안서에 실린 드로잉 가운데 가장 서늘한 장면이 이것이다. 굵은 먹으로 그린 창틀, 그 아래 놓인 소파 하나,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람은 없다. 그림 아래에는 짧은 문장 세 줄이 적혀 있다. 조용한 건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이 평수는 사는 곳이 아니라 투자하는 곳이라는 취지의 문장이다.

여기서 The Big Bend의 성격이 완전히 드러난다. 이건 높이 규제를 우회하려는 기술적 제안이 아니라, 초고층 주거가 실제로는 거주가 아니라 자산 보관을 위한 상품이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비평이다. 실제로 Billionaires’ Row의 고가 유닛 상당수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는 지적은 그때도 지금도 반복된다. 밤에 불이 켜지지 않는 창들 말이다.

The Big Bend drawing piercing a cloud
© oiio architecture studio

렌더링보다 손그림이 더 세다

제안서의 절반은 정교한 3D가 아니라 잉크로 그린 손드로잉이다.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검은 띠, 그 아래 발치에 놓인 20층짜리 옛 건물과 개미만 한 사람들. 실크햇을 쓴 신사들의 모자 길이로 높이 경쟁을 풍자한 컷도 있다. 모자가 길수록 잘난 사람이라는 그림 옆에, 두 사람이 모자 하나를 나눠 쓴 것 같은 아치가 놓여 있다.

이런 종류의 유머는 렌더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사진처럼 정교한 이미지는 “이게 실제로 지어진다”는 주장을 하지만, 손그림은 “이건 그림이다”라고 먼저 실토한다. 그러고 나서야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어쩌면 The Big Bend가 오래 회자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이 두 화법을 섞어 쓴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The Big Bend seen from street level on 57th Street
© oiio architecture studio

거리에서 올려다보면

가장 현실적인 질문은 아마 이것일 테다. 저 아래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스튜디오가 그린 가로 레벨 컷이 그 답을 대신한다. 화면 위쪽을 아치의 하부 구조가 가로막고, 그 아래로 고딕풍 옛 아파트와 노란 택시, 실크햇을 쓴 행인이 지나간다. 도시는 그대로인데 하늘만 사라졌다.

초고층 개발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결과가 딱 이렇다. 개별 건물은 저마다 정당한 이유로 올라가지만, 그 합은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그늘이 된다. Central Park에 드리우는 초고층 타워의 그림자 문제는 이 동네에서 실제 소송과 조례 논쟁으로 번진 사안이기도 하다. The Big Bend는 그 그늘을 과장해 눈앞에 들이민다.

Surreal interior render inside The Big Bend
© oiio architecture studio

9년이 지나 다시 보는 그림

The Big Bend는 끝내 설계도 한 장 인허가 창구에 접수되지 않았다. 발주처도, 부지도, 예산도 없었다. 처음부터 지어질 생각이 없는 건물이었다는 뜻이다. 그사이 이웃들은 착실히 완공됐다. Central Park Tower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주거 건물이 됐고, 111 West 57th Street는 높이 대비 폭 비율이 24대 1에 이르는 극단적인 슬렌더 타워로 올라섰다. 432 Park Avenue는 완공 몇 년 뒤 누수와 엘리베이터 고장, 건물 흔들림을 둘러싼 분쟁이 크게 보도됐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쪽과 실제로 지어진 쪽 가운데 어느 편이 더 이상한지, 지금 와서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졌다.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렌더링에는 구름이 깔린 유리 바닥 위에서 중절모를 떨어뜨린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있다. 발밑이 하늘이고 벽에 걸린 창밖에도 하늘이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알 수 없는 방. 세계에서 가장 긴 건물을 상상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그려 넣은 장면치고는 꽤 정직한 그림이다.

Architectsoiio architecture studio (Ioannis Oikonomou)
Photosioannis Oikonomou – oiio architecture studio
CategoryLiving Tower
Country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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