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계단이 책장을 가로지른다,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호텔 로비에 들어섰는데 프런트 데스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천장까지 꽉 찬 검은 책장이 한 벽을 통째로 덮고 있고, 그 앞을 붉은 계단이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계단은 난간도 디딤판도 감춘 채 하나의 덩어리로 휘어 올라가는데, 색이 워낙 강해서 책장에 꽂힌 수백 권의 책과 진열된 오브제들이 오히려 배경으로 물러난다.

Washington DC 남서쪽, 국회의사당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는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이다. 2020년 가을 문을 연 이 호텔은 네덜란드 브랜드 citizenM의 미국 다섯 번째 지점이고, 설계는 브랜드의 오랜 파트너인 Amsterdam의 concrete가 맡았다. 객실 252개에 12개 층. 규모만 보면 평범한 도심 호텔인데, 1층에서 벌어지는 일이 평범하지 않다.

Washington DC street with the US Capitol
© citizenM

의사당이 보이는 자리에 지은 호텔

주소는 550 School Street SW. National Mall 남쪽, L’Enfant Plaza 역에서 두 블록 거리다. 박물관과 연방 청사가 밀집한 구역이라 낮에는 관광객과 공무원이 뒤섞이고 밤에는 급격히 조용해지는 동네다.

Washington DC는 호텔 디자인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도시다. 연방 정부와 로비스트, 싱크탱크가 주 고객이니 대리석과 짙은 목재, 성조기 색 카펫이 기본값이 된다. 이 호텔은 정확히 그 반대를 골랐다. 도시가 요구하는 격식을 따르는 대신, 브랜드가 세계 어디서나 쓰는 문법을 그대로 들고 들어와 그 위에 워싱턴이라는 지역성을 얹었다.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living room seen from the entrance
© citizenM

프런트를 없애고 거실을 놨다

citizenM은 로비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 공간의 공식 명칭은 리빙룸이다. 체크인은 입구 옆 키오스크나 휴대폰 앱으로 1분 안에 끝나고, 그렇게 확보한 면적을 전부 앉을 자리로 돌린다.

계산 자체는 단순하다. 프런트 데스크와 그 뒤 백오피스, 대기 줄을 위한 빈 바닥을 합치면 상당한 넓이가 나온다. 이걸 없애면 같은 임대료로 훨씬 많은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호텔 투숙객만 쓰는 로비가 아니라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도 노트북을 펴는 자리가 되고, 결국 저녁에 술을 한 잔 파는 매출로 돌아온다.

천장이 두 개 층 높이로 트여 있는 것도 이 전략의 일부다. 좁은 부지에서 넓이를 못 얻으면 높이로 얻는다. 붉은 계단이 그 두 층을 잇는 유일한 수직 동선이자, 이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형물 역할을 겸한다.

Art wall with I have a dream neon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벽 하나에 도시의 정치사를 꽂아 넣었다

책장을 가까이서 보면 이 호텔이 워싱턴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칸마다 다른 것이 들어 있는데, 링컨의 초상이 현대적인 정장 차림으로 다시 그려져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여러 인물의 초상화가 이어진다. 한가운데에는 파란 네온으로 ‘I have a dream’이라고 쓰여 있다.

정치 도시의 상징을 이렇게 가볍게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워싱턴에서 링컨과 킹 목사는 함부로 인용하기 어려운 이름인데, 여기서는 그 이름들을 코뿔소 피규어와 만화 캐릭터, 낡은 백과사전 옆에 나란히 꽂아뒀다. 경건하게 모시는 대신 일상의 물건들 틈에 섞어놓은 것이다.

브랜드는 이 컬렉션을 지역 작가들에게 맡겼다. 파사드를 감싼 9개 층짜리 벽화는 New York에서 활동하는 Erik Parker가 그렸고, 리빙룸 벽화는 JD Deardourff가, 역대 대통령을 현대 복장으로 다시 그린 초상 연작은 Amit Shimoni가 맡았다. 객실에 걸린 작품들은 지역 갤러리 Stable 소속 작가들 몫이다.

Blue sofas and mural in the living room of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가구는 전부 Vitra다

리빙룸 안쪽으로 들어가면 색이 한 번 더 세진다. 천장에는 Nelson의 버블 램프가 크기를 달리해 여러 개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무지개색이 번지는 러그가 깔렸다. 소파는 짙은 데님색이고 그 위에 놓인 쿠션은 하나같이 다른 그림이다.

citizenM은 개관 이래 가구를 Vitra로 통일해왔다. 덕분에 이 브랜드의 호텔에서는 Eames와 Panton, Prouvé, Jean Nouvel의 의자를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디자인 가구를 파는 쇼룸을 호텔로 옮겨놓은 셈인데, 브랜드 입장에서는 계약 단가를 낮추면서 전 세계 지점의 인상을 통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조합이 헐겁지 않다. 벽화의 형광 분홍과 노랑, 소파의 청색, 러그의 무지개가 각자 세게 나가는데도 정리돼 보이는 건 바닥과 기둥, 책장을 전부 무채색으로 눌러놨기 때문이다. 검은 기둥 두 개가 화면을 세로로 잘라주는 역할도 크다.

Colourful display shelf and Vitra chairs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진열장이 곧 인테리어다

다른 쪽 벽면은 목재 진열장이다. 여기 놓인 것들이 재미있다. 그리스 조각의 석고 두상을 형광 노랑과 파랑으로 칠해 올려놨고, 코린트식 기둥머리는 분홍색이다. 아크릴 상자와 색색의 큐브가 그 사이를 채운다.

고전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태도인데, 국회의사당의 신고전주의 돔이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에서 이건 나름의 농담이 된다. 진짜 대리석 기둥이 도시를 지배하는 곳에서, 호텔은 같은 형태를 형광색 석고로 축소해 선반에 올려둔다.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이런 진열장은 그림 한 점을 거는 것보다 훨씬 싸게 벽을 채우면서, 손님이 다가가 들여다볼 이유를 만든다. 사진을 찍게 만드는 벽이기도 하고.

Eames lounge chair corner with mural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혼자 앉을 자리를 따로 만든다

리빙룸은 하나의 큰 방이지만 안에서 성격이 여러 번 바뀐다. 벽화 앞 코너에는 Eames 라운지 체어와 오토만이 놓였고, 그 옆에 아치형 플로어 램프가 넘어온다. 뒤로는 녹색 소파가 등받이를 높여 시선을 막아준다.

여럿이 앉는 긴 테이블, 둘이 마주 앉는 원형 테이블, 혼자 파묻히는 라운지 체어가 한 공간에 다 들어 있다는 게 이 브랜드의 실제 강점이다. 호텔 로비에서 혼자 있기 어색한 이유는 대개 앉을 자리가 전부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리’처럼 생겼기 때문인데, 여기서는 혼자 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canteenM bar with red bottle display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붉은 병 수백 개가 천장에 떠 있다

식음 공간은 canteenM이라 부르고 24시간 돌아간다. 바 위쪽에 금속 프레임으로 짠 선반이 떠 있는데, 거기에 붉은 병 수백 개가 빽빽하게 줄지어 있다. 조명을 받아 병 전체가 붉게 빛나면서 바 카운터 위에 붉은 천장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보인다.

바닥은 흑백 체크 타일이고 바 몸통은 목재다. 뒤쪽 벽에는 옛 신문 지면을 확대한 벽지가 붙어 있다. 정치 도시의 오래된 술집을 흉내 낸 것 같기도 한데, 그 위에 붉은 병 선반이라는 현대적인 장치 하나가 얹히면서 복고로 빠지지 않는다.

Long communal table at canteenM,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긴 테이블 하나로 충분한 이유

canteenM의 좌석은 크게 두 종류다. 바 앞에 늘어선 스툴, 그리고 열 명 넘게 앉는 긴 공용 테이블. 2인용 테이블을 촘촘히 깔지 않은 건 회전율 계산이 다르기 때문이다.

혼자 출장 온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은 호텔에서 2인 테이블은 절반이 늘 비어 있다. 긴 테이블 하나로 통일하면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사람을 앉히면서, 혼자 온 사람이 빈 테이블을 독차지한다는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의자만 빨강·회색·흰색으로 섞어 늘어놔 단조로움을 없앴다.

societyM meeting room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2층, 회의실 이름은 societyM

붉은 계단을 오르면 2층에 회의실이 나온다. 이름은 societyM, 모두 일곱 개이고 큰 방은 열여덟 명까지 들어간다. 벽 일부를 필기 가능한 마감으로 처리해 화이트보드를 따로 두지 않았다.

사진 속 방을 보면 이 호텔이 회의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 수 있다. 긴 원목 테이블 둘레에 빨강·노랑·파랑·초록 의자를 색깔별로 섞어 놓았고, 천장에는 전구를 뭉쳐 만든 대형 펜던트가 두 개 걸렸다. 벽면 진열장에는 옛 타자기와 필름 카메라, 지구본이 놓였다.

워싱턴에서 회의실을 빌린다는 건 대개 로펌이나 협회 건물의 무채색 방을 예약한다는 뜻이다. 그 시장에 색깔부터 다른 방을 내놓은 셈인데, 컨설팅 회사나 비영리 단체처럼 딱딱하지 않은 인상을 원하는 조직에게는 이쪽이 오히려 맞다.

Guest room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객실은 작다, 대신 침대가 벽에서 벽까지 간다

객실 문을 열면 화장실 칸이 먼저 나오고 그 옆으로 세면대가 붙어 있다. 방은 좁다. 그런데 침대는 킹사이즈이고, 좌우 벽에 거의 닿을 만큼 크다. 창은 벽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침대 머리맡이 바로 그 창이다.

공간을 줄이는 대신 침대에 몰아준 배분인데, 브랜드가 처음부터 내세운 논리다. 호텔 방에서 실제로 하는 일은 자는 것과 씻는 것뿐이니 나머지는 아래층 리빙룸에서 해결하라는 것. 책상과 옷장, 미니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명과 블라인드, TV, 온도는 침대 옆 태블릿 하나로 조작한다. 벽 스위치를 찾아 헤맬 일이 없는 대신, 태블릿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농담이 따라붙는다. citizenM은 객실을 공장에서 모듈로 만들어 현장에서 쌓아 올리는 방식을 쓰는데, 모든 지점의 방이 똑같은 것도 그래서다.

cloudM rooftop bar with painted ceiling at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 citizenM

12층, 천장이 그림인 바

꼭대기 층에는 cloudM이라는 바가 있다. 여기서 가장 강한 건 천장이다. 곡면으로 내려온 천장 전체가 하나의 회화로 덮여 있는데, 형광 분홍과 초록, 보라가 뒤엉킨 만화적인 화면이다. 아래에는 구리색 갓을 씌운 펜던트가 줄지어 매달렸다.

천장을 캔버스로 쓰는 건 바에서 꽤 영리한 선택이다. 사람이 차면 벽은 어차피 안 보이고, 앉은 사람의 시선은 위로 향한다. 스테인리스 바 카운터와 흰 대리석, 헤링본 바닥은 오히려 담백하게 눌러놨다.

cloudM rooftop terrace looking towards the US Capitol
© citizenM

결국 이 호텔이 파는 것

바 바깥은 테라스다. 소파에 앉아 정면을 보면 낮은 연방 청사 지붕들 너머로 국회의사당 돔이 정확히 걸린다. Washington DC는 의사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오래전부터 높이를 규제해온 도시다. 그래서 12층짜리 호텔 옥상이 이 도시에서는 충분히 전망대 노릇을 한다.

규제가 만든 낮고 평평한 스카이라인이 역설적으로 이 테라스의 자산이 된 셈이다. 실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리 요란해도, 손님이 끝까지 기억하는 장면은 결국 이 앵글일 가능성이 높다.

이 호텔은 방을 줄여 1층을 키우고, 격식을 줄여 색을 키우고, 서비스 인력을 줄여 앱으로 대체한 뒤, 그렇게 아낀 것을 가구와 미술과 옥상 전망에 몰아넣었다. 어디에 돈을 쓰지 않을지를 먼저 정하고 시작한 설계이고, 붉은 계단은 그 결정의 결과물 중 가장 눈에 띄는 하나일 뿐이다.

 
 
 

프로젝트: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
인테리어·건축 디자인: concrete (Amsterdam)
위치: 550 School Street SW, Washington DC, USA
용도: 호텔
규모: 지상 12층, 객실 252실
주요 공간: 리빙룸, canteenM(24시간), societyM 회의실 7실(최대 18명), cloudM 루프탑 바·테라스(12F)
가구: Vitra
아트: Erik Parker(파사드 벽화), JD Deardourff(리빙룸 벽화), Amit Shimoni(대통령 초상 연작), Stable 소속 작가(객실)
개관: 2020년 가을
사진: © citizenM

더 볼만한 기사

댓글 남기기

댓글 내용을 입력해 주세요
이름을 입력해 주세요

추천 기사

벽 하나 허물지 않고 색으로 뒤집은 38㎡, 상트페테르부르크 아파트

임대로 내놓을 집을 손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예산부터...

호텔 같은 공개공지를 제공하는 서호주 시티 내 아파트

호주 아파트는 국내 아파트와 다르다. 굉장히 허름하거나 굉장히 으리으리하다....

작은 거실 인테리어 고민을 해결해주는 상파울루 아파트 공간 활용 방법

넓은 공간, 구조의 주택보다  작은 공간일수록, 또 단독 주택...

임대사업자는 시큰둥한데 — 정부는 빌라·오피스텔 13만호를 민다

정부가 다세대·다가구·오피스텔 규제를 대거 풀어 2030년까지 13만호 착공을 유도한다. 그런데 정작 이를 사들여 임대할 개인사업자들은 세제 혜택 축소로 시큰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