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해안주택이라고 하면 보통 화이트 판자벽, 바다를 향해 활짝 펼친 데크, 해풍에 바랜 목재부터 떠오른다. 빅토리아주 바원헤즈(Barwon Heads)의 Barwon Dunes House는 그 공식에서 한 발 비켜선다. 흙다짐 벽을 집의 아랫도리로 단단히 깔고, 그 위에 둥글게 휜 목재 스크린을 얹었다.
다섯 식구의 지금뿐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 독립한 뒤의 모습까지 내다보고 지은, 이른바 ‘포에버 홈’이다. 설계는 멜버른의 Eliza Blair Architecture가 맡았고 Studio MKN이 협업했다. 완공은 2024년. 무겁고 단단한 아래층, 가볍게 떠 있는 위층,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다리 하나. 이 집이 바닷가에서 오래 버티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재택근무가 불러낸 바닷가 정착
바원헤즈는 멜버른 남서쪽 벨라린 반도(Bellarine Peninsula) 끝, 바원강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어귀에 자리한 작은 해변 마을이다. 호주에서는 도시 생활을 접고 바닷가로 이사하는 것을 ‘시 체인지(sea change)’라고 부르는데, 공교롭게도 이 말이 대중화한 계기가 된 1990년대 드라마 〈SeaChange〉의 주 촬영지가 바로 여기다.
건축주 가족이 Eliza Blair를 찾아간 건 2021년이다.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근무가 자리 잡자 ‘굳이 도시에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생겼고, 그 답이 이 해변 마을의 주 거주지였다. 주말 별장이 아니라 매일 사는 집이니 주문도 분명했다. 오래 버틸 것, 그리고 가족이 바뀌는 만큼 같이 바뀔 것. 진입로에서 올려다본 외관이 첫인상부터 묵직한 이유다.

흙다짐 벽이 무게를, 목재 스크린이 가벼움을
외관은 두 재료가 나누는 대화에 가깝다. 땅에 붙은 아래층은 래머드 어스(Rammed Earth), 그러니까 흙을 거푸집에 붓고 한 켜씩 다져 올리는 흙다짐 공법으로 벽을 세웠다. 켜켜이 쌓인 가로 줄무늬가 해안 절벽의 지층처럼 읽힌다.
위층은 사정이 다르다. 호주산 하드우드인 Blackbutt 목재 루버가 곡선을 그리며 감싸 훨씬 가볍게 떠 보인다. 묵직한 받침대 위에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바구니 하나를 올려둔 형국이랄까. 흙다짐 벽은 열을 오래 머금는 축열체라 한낮의 열기를 천천히 받아들였다가 밤에 내놓는다. 일교차가 큰 해안 기후에서 실내 온도가 덜 출렁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원 너머로 솟은 굴뚝 역시 같은 흙다짐이다.

곡면은 이웃의 시선과 햇빛을 함께 거른다
위층은 왜 굳이 둥글까? 설계팀은 곡면이 대지의 방위와 옆집들의 위치에 맞춰 나온 형태라고 설명한다. 반듯한 상자였다면 모서리마다 이웃집 창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자리를, 곡면이 슬쩍 돌려 비켜 세운다.
수직 루버는 고정돼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정면에서는 풍경을 열어주고,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남의 시선을 막는다. 한낮의 강한 볕은 루버 간격만큼 잘게 쪼개져 들어온다. 현관이 위층 스크린 아래로 쑥 들어가 있는 것도 같은 계산이다. 비와 바닷바람을 피할 처마를 따로 달 필요가 없다.

브라운 한 가지를 열 가지로 쓰는 법
현관에 들어서면 색이 거의 하나다. 벽은 흙다짐, 천장은 하드우드, 바닥은 라임스톤, 주방과 욕실에는 트래버틴. 전부 브라운과 베이지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한 색 계열로 밀어붙이면 지루해지기 쉬운데 이 집은 결로 버틴다. 흙다짐의 가로 줄무늬, 목재의 세로 결, 라임스톤의 보송한 표면, 트래버틴의 구멍 송송한 질감이 같은 톤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색은 줄이고 질감은 늘리는 이 방식은 요즘 ‘콰이어트 럭셔리’라 불리는 인테리어 흐름과 정확히 겹친다. 집에서 이 조합을 빌려 오고 싶다면 원칙은 두 가지면 된다. 톤은 2~3단계 안에서 묶고, 재료의 결 방향은 가로·세로·무결로 서로 다르게 고를 것. 예를 들어 오크 원목 마루에 석회 질감 도장 벽, 트래버틴 패턴 타일을 더하면 비슷한 깊이가 난다.

2개 층이 트인 거실, 집의 심장이 되다
이 집의 중심은 2개 층 높이로 시원하게 뚫린 거실이다. 흙다짐 벽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한 장으로 솟고, 그 앞에 둥글게 휘어진 대형 소파가 놓였다. 높은 천장은 사람을 들뜨게도 하는데, 이 집은 소파와 테이블을 낮고 넓게 깔아 시선의 무게중심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공간은 성당처럼 높지만 앉아 있으면 동굴처럼 아늑한 건 그래서다.
눈길을 끄는 건 허공에 길게 늘어뜨린 화이트 펜던트 두 개다. 종이나 패브릭으로 보이는 셰이드가 서로 다른 실루엣으로 주름지며 2개 층 높이를 세로로 채운다. 층고가 높은 공간은 천장 매입등만으로는 빛이 바닥까지 힘 있게 내려오지 못하고, 사람 눈높이의 허공이 휑하게 비어 버린다. 중간 높이에 광원을 띄워 주는 펜던트가 필요한 이유다. 셰이드를 한 번 통과한 확산광이라 흙다짐 벽의 결을 거칠게 드러내지 않고 부드럽게 감싼다.
욕심을 하나 더 내자면 벽을 위한 빛이다. 사진으로는 벽면을 따로 비추는 조명이 눈에 띄지 않는데, 흙다짐처럼 요철이 있는 벽은 바닥이나 천장 가장자리에서 벽을 스치듯 비추는 그레이징(grazing) 조명 하나로 밤에도 지층 같은 줄무늬가 살아난다. 2700~3000K의 따뜻한 색온도에 디머를 달아 두면, 저녁에는 펜던트를 낮추고 벽만 은은하게 띄우는 장면도 만들 수 있다.

가느다란 스틸 브리지가 가족을 잇는다
거실 위로는 가느다란 스틸 브리지가 가로지른다. 위층 방들을 잇는 통로인데, 계단과 같은 올리브 톤으로 칠해 흙다짐과 목재 사이에서 조용히 튀는 포인트가 됐다. 다리가 얇을수록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막힘이 적고, 빛과 바닷바람도 위아래로 자유롭게 돈다. 설계팀이 이 브리지를 두고 집 안에 ‘연결의 순간’을 만든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심리적인 효과도 크다. 방으로 올라가는 아이는 거실의 부모와 눈을 마주치고, 부모는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위층의 기척을 느낀다. 방문을 닫으면 각자의 시간, 브리지에 서면 다시 한 가족. 사춘기 자녀를 둔 집이라면 이 적당한 거리감이 꽤 요긴하다. 계단 하나로 흩어진 가족 동선을 다시 묶은 〈계단 하나로 가족을 다시 이었다, Waverley House〉와 나란히 보면 ‘연결’을 푸는 서로 다른 방식이 보인다.

벽 대신 벽난로로 거실을 나눴다
거실의 또 다른 축은 흙다짐으로 쌓은 벽난로 매스다. 벽처럼 서서 공간을 가르지만 양옆이 트여 있어 막힌 느낌은 없다. 덕분에 한 층이 하나의 큰 방이면서도 앉는 곳, 먹는 곳, 지나가는 곳이 저절로 나뉜다.
설계팀이 꼽은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가족생활을 위한 조닝’이다. 칸막이벽 대신 덩어리로 구역을 나누면, 아이들이 자라 쓰임이 바뀌어도 공간이 그대로 따라간다. 창에는 얇은 시어 커튼을 겹쳐 해안의 센 빛을 한 번 걸렀다. 벽난로 앞 낮은 원형 테이블과 크림 톤 소파까지, 거실의 모든 것이 바닥 가까이 머문다.

트래버틴 아일랜드를 둥글게 깎은 주방
주방 아일랜드는 트래버틴 덩어리를 통째로 내려놓은 듯한 모양이다. 모서리를 둥글게 굴려 외관의 곡면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상부장은 크림 톤 플랫 도어로 납작하게 눌렀고, 냉장고와 수납은 목재 벽 안으로 숨겼다. 싱크대 앞에는 가로로 긴 창을 내 산울타리의 그린을 띠처럼 걸어 두었다.
천장에는 작은 스폿 조명 몇 개만 일렬로 달아 작업등 역할을 맡겼다. 주방이 ‘가구’처럼 보이는 건 손잡이와 가전이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집에서 따라 한다면 아일랜드 마감 하나에만 힘을 주고 나머지 수납장 면은 최대한 조용하게 두는 게 요령이다. 트래버틴이 부담스럽다면 석회암 질감의 포세린 타일이나 무광 세라믹으로도 비슷한 톤을 낼 수 있다.

원뿔형 펜던트 아래, 정원으로 열리는 다이닝
다이닝룸은 양옆을 흙다짐 벽으로 막은 대신 정면을 통째로 열었다. 큰 개구부를 열어젖히면 식탁이 그대로 테라스와 정원으로 이어진다. 왼쪽 벽 아래에는 가로로 긴 벽난로를, 오른쪽에는 흙다짐 벽에 붙여 짠 긴 선반을 두었다.
식탁 위에는 원뿔형 대형 펜던트 하나가 낮게 내려와 있다. 식탁 펜던트는 상판에서 70~80cm 높이까지 내리면 빛이 음식과 얼굴에 고이고 주변은 자연스럽게 어두워진다. 전반조명을 줄이고 테이블 위에만 빛 웅덩이를 만드는 셈이다. 넓은 방에서도 식사 자리가 아늑하게 느껴지는 비결이 이 높이 하나에 있다. 집에서도 펜던트가 너무 높게 달려 있다면 줄 길이만 조정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바닷바람을 등진 야외 거실
테라스는 이 집의 두 번째 거실이다. 퍼걸러 아래 긴 테이블과 야외 벽난로를 두고, 흙다짐 벽을 바람막이로 세웠다. 해안 마을의 바람은 생각보다 매섭다. 바다를 향해 활짝 펼친 데크는 사진으로는 근사해도 실제로는 1년에 며칠 못 쓰는 경우가 흔하다.
이 집은 반대로 사방을 벽으로 감싼 ‘보호된 테라스’를 택했다. 넝쿨이 퍼걸러를 타고 오르고, 조경가 Phillip Withers가 심은 해안 식물들이 둘레를 채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래스류가 흙다짐 벽의 단단함과 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흐려지는 건 문을 열어서가 아니라, 바깥도 안처럼 아늑하게 만들어서다.

곡면 매스 안쪽에 들어앉은 서재
밖에서 본 곡면 매스의 안쪽은 이런 모습이다. 휘어진 벽을 따라 책상을 길게 짜 넣었고, 창밖으로 목재 루버가 줄지어 선다. 밖에서는 시선을 막던 루버가 안에서는 빛을 세로 줄무늬로 쪼개 책상 위에 떨어뜨린다.
하이브리드 근무가 이 집을 짓게 만든 출발점이었으니, 이 방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답인 셈이다. 곡면 벽은 어디에 앉아도 등 뒤가 열려 있는 느낌을 준다. 각진 방 구석에 책상을 붙였을 때의 답답함과는 결이 다르다. 오래 앉아 일하는 방일수록 시선이 멀리 빠져나갈 틈이 집중력을 좌우한다.

올리브 그린 타일로 숨 돌린 욕실
집 전체가 브라운으로 흐르다 욕실에서 처음으로 색이 바뀐다. 작은 정사각 타일을 올리브 그린으로 벽 전체에 깔고, 세면대 상판은 주방과 같은 트래버틴으로 맞췄다. 목재 프레임 거울 두 개를 나란히 건 것도 집 전체의 언어 그대로다. 재료는 이어 가고 색만 한 톤 바꾼 방식이라 튀지 않으면서도 환기가 된다.
욕실처럼 작은 방은 집 전체 팔레트에서 한 발 벗어나 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면적이 작아 실패해도 부담이 적고, 매일 짧게 머무는 방이라 색이 주는 기분 전환 효과는 오히려 크다. 그린 계열 타일은 우드·스톤과 특히 잘 어울리는데, 채도를 낮춘 세이지나 올리브 쪽을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확 줄어든다.

천천히 낡아 가도록 고른 재료들
모서리를 통유리로 연 거실 앞으로 그래스가 무성하다. 설계팀은 소금기 머금은 공기와 바람,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재료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금속 마감은 우아하게 나이 들도록 골랐고, 목재 외장은 해풍 속에서 차츰 실버 그레이로 바래 갈 것이다. 흙다짐 벽은 애초에 땅에서 온 재료라 비바람에 조금씩 닳아도 그게 곧 표정이 된다.
침실 다섯 개를 둔 이 집은 지금은 아이들 방으로 북적이지만, 쓰임을 못 박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떠난 뒤에는 서재가 되고 손님방이 될 것이다. 같은 빅토리아주 산골에서 전기와 수도를 끊고 지은 〈전기도 수도도 끊었더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Howqua River Lodge〉가 고립에서 답을 찾았다면, 이 집은 해변 마을 한복판에서 오래 사는 법을 찾았다. 새집일 때가 가장 예쁜 집보다 10년 뒤에 더 좋아질 집. 포에버 홈이라는 말의 진짜 뜻은 아마 그쪽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