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콕 카페 Harudot Thonburi 앞에 서면 계단부터 눈에 들어온다. 보통 건물은 계단을 숨긴다. 비상계단은 뒤편에, 계단실은 벽 속에 넣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 카페는 정반대로 간다. 레드 나선계단 여러 개를 건물 정면에 그대로 내걸고, 그 계단을 이 카페의 얼굴로 삼았다.
2026년 9월 4일 문을 연 이 3층짜리 방콕 카페는 태국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NANA Coffee Roasters가 운영하는 Harudot의 새 단독 매장이다. 베이지 곡면 벽이 극장 커튼 자락처럼 겹겹이 늘어서고, 그 틈마다 레드 계단이 감겨 올라간다. 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 그대로 무대 위 배우가 되는 구조랄까. 개장 직후부터 방콕 서쪽에서 사진 찍으러 일부러 찾아가는 카페로 떠오른 이유가 한눈에 보인다.

계단이 파사드가 된 방콕 카페
정면에 서면 먼저 들어오는 건 벽이 아니라 계단이다. 높이가 제각각인 곡면 벽 여러 장이 세로로 늘어서 있고, 벽과 벽 사이 틈으로 레드 나선계단이 1층부터 옥상까지 비틀리며 올라간다. 옥상 가장자리에도 같은 레드 난간이 둘러져 있어, 계단이 건물 꼭대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늘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읽힌다.
브랜드 쪽이 내건 콘셉트 문구는 ‘THE ARCHITECTURE OF ASCENT – When Movement Becomes Architecture’다. 우리말로 옮기면 ‘오르는 건축, 움직임이 곧 건축이 될 때’ 정도가 된다. 설계의 출발점이 외관 장식이 아니라 동선이었다는 선언인 셈이다.
색 대비도 계산돼 있다. 따뜻한 베이지 벽은 햇빛을 받으면 거의 크림처럼 부드럽게 빛나고, 그 사이 레드 스틸 계단은 그림자 속에서도 선명하게 튄다. 벽이 액자이고 계단이 그림인 구도다. 사진 한 장에 건물의 전부가 담기니 SNS에서 이만큼 잘 퍼지는 것도 당연하다.

왜 하필 Thonburi, 쇼핑몰 앞 170m²
Thonburi는 짜오프라야강 서쪽 지역을 두루 부르는 이름이다. 1767년부터 1782년까지 짧게나마 시암의 수도였지만, 수도가 강 건너 라따나꼬신으로 옮겨간 뒤로는 오랫동안 방콕의 ‘뒷마당’ 취급을 받았다. 관광객이 몰리는 카페 지도는 대부분 강 동쪽 수쿰윗·아리·통로에 몰려 있다.
Harudot Thonburi가 들어선 곳은 그 서쪽 동네 중에서도 파시짜런(Phasi Charoen) 구, Seacon Bangkae 쇼핑몰 바로 앞이다. MRT 블루라인 Phasi Charoen역 2번 출구에서 몇 걸음이면 닿는다. 2019년 블루라인이 이쪽으로 연장된 뒤 주거 인구가 두텁게 깔린 이 일대는 도심 접근성이 확 좋아졌고, 브랜드 입장에서는 강 서쪽 사람들이 굳이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우리 동네 랜드마크’를 선점한 셈이다.
규모는 크지 않다. 매장 면적은 약 170m², 3개 층에 80석 남짓이다. 대형 몰 옆 작은 필지에 단독 건물을 세울 때 가장 쉬운 선택은 몰의 그늘에 묻히는 것인데, 이 카페는 반대로 몰 앞마당을 자기 무대의 객석처럼 쓴다. 몰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매일 이 정면을 지나칠 수밖에 없으니, 파사드 자체가 광고판 역할을 한다.

극장 커튼과 오페라 계단, 이 형태는 어디서 왔나
브랜드가 밝힌 영감의 원천은 유럽식 극장이다. 곡면 벽이 겹겹이 접힌 모양은 무대의 벨벳 커튼을, 레드라는 색은 극장 객석과 카펫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커튼의 주름을 건축 스케일로 키우면 딱 이런 모양이 나온다. 벽 하나하나가 아래쪽에서 비스듬히 잘려 나가며 계단을 드러내는데, 막이 막 걷히기 시작한 순간을 정지 화면으로 붙잡아 둔 것 같다.
극장 건축에서 계단은 원래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1875년 문을 연 파리 오페라 극장 Palais Garnier(팔레 가르니에)의 대계단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부르주아 관객은 공연을 보러 가는 동시에 그 계단 위에서 자신을 보여주러 갔다. 보고 보이는 행위 자체가 공연의 일부였던 셈인데, 인스타그램 시대의 카페가 계단을 정면에 내건 논리와 놀랄 만큼 닮았다.
동선을 건물 바깥으로 꺼내 얼굴로 삼는 발상도 계보가 있다. 1977년 문을 연 파리 Centre Pompidou(퐁피두 센터)는 에스컬레이터를 투명 튜브에 담아 파사드에 그대로 붙였다. 설비와 구조, 동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하이테크 건축의 상징 같은 장면이다. Harudot Thonburi는 그 기계적인 솔직함을 곡선과 색으로 부드럽게 번역한 쪽에 가깝다.
레드 계단과 파스텔 벽의 조합에서 스페인의 La Muralla Roja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973년 Ricardo Bofill(리카르도 보필)이 지중해 해안에 세운 이 집합주거는 계단과 브리지가 미로처럼 얽힌 레드 외벽으로 지금도 사진가들의 순례지다. 계단을 조각처럼 다루고 색으로 동선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이 카페는 그 포스트모던 감각을 상업 공간 버전으로 끌어온 것처럼 보인다.

바깥 나선계단과 안쪽 직선 계단, 동선을 두 겹으로 짜다
이 건물의 동선은 두 겹이다. 바깥쪽에는 곡면 벽 틈을 따라 오르는 레드 나선계단들이 있고, 안쪽에는 레드 미장으로 감싼 직선 계단이 층과 층을 잇는다. 실내에서 유리 너머를 보면 나선계단이 창밖에서 빙글빙글 돌며 올라가는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계단이 벽 밖에 붙어 있으니 실내 바닥 면적은 좌석과 카운터에 온전히 돌아간다.
나선계단은 이동 효율로만 보면 좋은 계단이 아니다. 폭이 좁고, 쟁반을 들고 오르기도 불편하다. 대신 한 바퀴 돌 때마다 시야가 바뀐다. 한 칸 오르면 몰 쪽 광장이, 또 한 칸 오르면 곡면 벽의 안쪽이, 더 오르면 방콕 서쪽 하늘이 열린다. 계단을 빨리 올라가는 통로가 아니라 풍경을 한 장씩 넘기는 장치로 쓴 셈이다.
앞서 소개한 〈두 필지, 하나의 나선으로 이은 카페, 로즈마리 카페〉도 나선 동선 하나로 공간 전체를 엮어낸 경우다. 다만 로즈마리 카페가 나선을 건물 안쪽의 뼈대로 삼았다면, Harudot Thonburi는 나선을 바깥으로 꺼내 간판으로 쓴다는 점이 다르다.

1층은 커피 바, 위로 갈수록 머무는 공간
층별 성격은 비교적 분명하다. 1층은 곡선 카운터를 두른 커피 바와 베이커리 쇼케이스가 중심이고, 주문하고 픽업하는 사람들로 가장 분주하다. 바닥에는 핑크와 크림 톤의 체크 패턴 타일을 깔아, 위층에서 내려다볼 때 1층 전체가 하나의 무대 바닥처럼 읽힌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좌석이 곡면 벽을 따라 흘러가듯 배치된다. 커피, 베이커리, 브런치, 좌석 구역이 층을 달리하며 이어지고, 3층은 실내와 야외로 나뉜 루프톱이다. 한 잔 들고 금방 나가는 손님은 1층에서, 노트북을 펴고 오래 머무는 손님은 위로 흩어지는 구조다. 퍼블릭에서 프라이빗으로, 짧은 체류에서 긴 체류로 위계가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런 적층은 도심 소형 카페의 공식이 된 지 오래지만, 이 건물은 층을 오르는 과정 자체를 보상으로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계단이 불편해도 올라갈 이유가 있고, 올라가면 방콕 방캐(Bang Khae)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루프톱이 기다린다. 체류 시간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좌석을 늘리는 게 아니라 ‘더 올라가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벽에서 튀어나온 박스석, 카페 인테리어 속 극장
실내에서 극장 모티프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보이드다. 몇 개 층이 트인 레드 벽면 위쪽에 작은 발코니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있다. 오페라 극장 벽면에 붙은 박스석을 그대로 떼어 온 모양이다. 그 안에 선 사람은 아래층 손님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된다.
이 장치는 공간 심리를 영리하게 건드린다. 사람은 남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 등 뒤가 막히고 앞이 트인 자리를 본능적으로 편하게 느낀다. 박스석은 딱 그 조건을 갖춘 자리이자, 동시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을 모으는 무대다. 앉는 자리 하나로 관객과 배우 역할을 한꺼번에 주는 셈이다.
레드 계단을 인테리어의 주인공으로 세운 사례로는 citizenM Washington DC Capitol도 함께 볼 만하다. 거기서는 계단이 책장을 가로지르며 로비의 시선을 끌어모은다. 강한 색의 계단 하나가 공간의 중심축이 되는 원리는 호텔 로비든 동네 카페든 똑같이 통한다.

구형 펜던트와 코브 조명, 레드 벽을 살리는 빛
조명도 눈여겨볼 만하다. 좌석 위에는 레드 스템에 매달린 화이트 구형 펜던트가 여러 개 떠 있고, 곳곳에 같은 글로브를 얹은 스탠드 조명이 놓였다. 계단 난간 옆에는 곡선 암 끝에 반투명 유리 글로브를 매단 기구가 있어, 조명 자체가 곡선 인테리어의 연장처럼 보인다. 커피 바 위 곡면 천장 가장자리에는 빛을 천장으로 튕겨 올리는 간접 조명 라인이 따라 흐른다.
이 조합이 중요한 이유는 벽이 레드이기 때문이다. 짙은 색 마감은 빛을 먹는다. 같은 밝기의 조명을 달아도 화이트 벽보다 훨씬 어둡게 느껴진다. 그래서 천장을 적시는 간접 조명으로 전반적인 밝기(앰비언트)를 깔고, 테이블 위 펜던트로 손 닿는 곳을 비추는 국부 조명을 얹고, 계단과 곡면 벽에 떨어지는 빛으로 연출을 더하는 세 겹 구성이 필요하다. 사진으로 보면 전체 톤이 따뜻한 쪽이라, 레드와 베이지가 탁해지지 않고 한층 부드럽게 살아난다.
집에 짙은 포인트 벽을 만들고 싶다면 이 카페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벽 색을 과감하게 쓰는 대신 천장 몰딩이나 커튼박스 안에 라인 조명을 숨겨 간접광을 확보하고, 전구는 2700~3000K 웜톤으로 맞춘다. 거기에 유백색 글로브 스탠드 하나만 더해도 짙은 벽이 답답하지 않고 아늑하게 읽힌다.

레드 미장과 테라조, 곡선이 만든 인테리어의 촉감
위층 라운지로 가면 벽과 천장이 통째로 레드 톤의 미장 마감으로 감싸여 있다. 손맛이 살짝 남은 매트한 표면이라, 같은 레드라도 페인트를 매끈하게 바른 벽보다 훨씬 부드럽고 깊어 보인다. 바닥은 잔 골재가 박힌 테라조, 벽을 따라 휘어진 벤치는 짙은 버건디 패브릭으로 씌웠다.
재료 선택이 영리한 이유는 색이 하나로 통일돼 있어서다. 벽, 바닥 일부, 계단, 벤치가 모두 레드 계열의 명도만 달리한 톤온톤이라, 곡선이 많은데도 산만하지 않다. 곡선 공간은 모서리가 없어 시선이 한곳에 걸리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 흐름을 재료 대비가 끊지 않도록 색을 한 계열로 묶은 셈이다.
원통형 볼륨 하나는 우드로 마감해 레드 일색의 공간에 온기를 더한다. 딱딱한 미장과 테라조 사이에 나무와 패브릭이 끼어들면서, 사진으로 볼 때보다 실제로 앉았을 때 더 편한 공간이 된다. 방콕의 뜨거운 오후에 에어컨 바람을 쐬며 오래 앉아 있게 만드는 건 결국 이런 촉감이다.

블랙 박공지붕에서 레드 커튼으로, Harudot 시리즈의 변신
Harudot이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봄을 뜻하는 ‘하루(haru)’와 출발점을 뜻하는 ‘닷(dot)’을 합친 말이다. 해변 도시 촌부리(Chonburi)에 먼저 문을 연 단독 매장은 2023년 IDIN Architects가 설계했다. 블랙으로 마감한 박공지붕 세 동이 벌어진 틈으로 바오밥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라는, 절제된 일본풍 미학의 카페였다.
Thonburi 지점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블랙 대신 베이지와 레드, 직선 박공 대신 겹겹이 휘는 곡면 벽, 나무 한 그루 대신 계단 여러 개가 주인공이다. 같은 브랜드가 지점마다 전혀 다른 건축 언어를 쓴다는 건, 이제 카페가 커피 맛만큼이나 ‘가볼 만한 장소’로 경쟁한다는 뜻이다. 매장 하나하나가 브랜드의 목적지가 되는 전략이다.
그래도 앞마당에서는 시리즈의 흔적이 보인다. 곡면 벽 앞 원형 화단에 나무를 심고 자갈과 잔디 패치로 진입로를 꾸며, 도시 한복판에서도 식물이 건물의 일부로 들어오게 했다. 새로운 시작과 성장이라는 이름의 뜻을 촌부리에서는 나무로, Thonburi에서는 끝없이 위로 감겨 오르는 계단으로 풀어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