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서 있으려면 그 자리에 있던 무언가가 먼저 지워져야 한다. 그런데 건축은 대개 새로 세워진 것만 바라볼 뿐, 무엇이 치워졌는지는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신간 Erasure by Design은 바로 그 지워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 V. Mitch McEwen은 프린스턴대학교 건축학과 조교수이자 실무 건축가, 건축사학자, 비평이론가를 겸하는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Columbia Books on Architecture and the City가 28달러에 펴낸 이 책은 역사와 이론, 비평을 한데 엮어 “소거의 프로토콜(protocols of erasure)”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종화된 데이터를 동원해 특정 동네 전체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정화된’ 환경을 세우는 패턴이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반복돼왔다는 것이다. McEwen은 이를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익숙한 단어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대신 재개발로 사라진 산업용지, 철거를 앞둔 도심 공공주택, 로스앤젤레스의 백인 이탈과 석유 채굴 패턴까지를 모두 같은 ‘소거’ 프로젝트의 사례로 엮어낸다.
‘블라이트(blight)’는 우연이 아니다
책이 특히 힘을 쏟는 개념은 ‘블라이트(blight, 노후·불량 지구 판정)’다. McEwen은 이를 단순한 서술어가 아니라 능동적인 관료적 절차로 다시 읽는다. 워싱턴 D.C. 남서부에서 세인트루이스 북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까지 사례를 훑으며, 면적 평가나 인구총조사, 항공 지도 같은 평가 기법이 어떻게 동원되는지를 짚는다. 이렇게 ‘블라이트’로 규정된 동네는 이주민·빈곤층·성소수자·유대인·흑인 거주 지역에 불균형하게 몰려 있었고, 그 판정은 결국 철거를 정당화해 ‘깔끔한’ 건물과 ‘평범한’ 콘도, 주차장이나 경기장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줬다는 것이 McEwen의 분석이다.

세인트루이스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다뤄진다. 악명 높은 Pruitt-Igoe 단지는 원래 ‘슬럼’을 밀어내고 들어선 재개발 프로젝트였다. 이후 백인 이탈로 입주 인구 구성이 바뀌자, 이 소비에트풍 단지는 미군 화학부대가 지붕 위에서 에어로졸을 살포해 생물학전이 거주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시험하는 장소로 쓰였다. 훗날 ‘물리적 보안 프로그램 부재’를 이유로 재건축 예산이 끊겼고, 단지는 결국 철거된 뒤 국가지리정보국(NGA) 부지가 됐다. 최근에는 인근 페어그라운드 파크가 위성 조사를 근거로 한 ‘블라이트 조사’ 대상에 올라 코로나19 이후 연방 재개발 자금의 표적이 됐다. 같은 패턴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게 McEwen의 지적이다.
MoMA와 필립 존슨을 정면으로 겨누다
책은 ‘좋은 디자인’을 떠받들어온 학계의 역할도 비켜 가지 않는다. 193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연 ‘Housing Exhibition of the City of New York’에서는 슬럼 임대주택을 재현한 모형에 바퀴벌레 모형까지 배치해 관람객의 혐오감을 자극했다. McEwen은 이어 MoMA 건축 갤러리에 여전히 이름이 남아 있는 초대 디렉터 겸 후원자 Philip Johnson을 정조준한다. 1차 사료를 근거로 그가 나치 독일과 맺었던 관계, 이민자 슬럼을 ‘정화’해 ‘사회 위생’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이뤄진 제3제국 초청 투어 이력을 재구성한다. 나아가 그의 대표작 Glass House의 공간 배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벙커·굴뚝·연못 사양과 겹친다는 논쟁적인 해석까지 내놓는다. 일부 비교 사진은 게재 허가를 받지 못해 책에는 검은 사각형으로 대체돼 있다.
McEwen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더니즘이 미국에서 거듭 변주되며 소거의 도구로 쓰여온 과정을 짚는다. 흑인·성소수자·이민자 동네를 ‘깔끔한’ 선과 ‘하얀’ 공간, ‘진보’의 증거로 대체해온 우생학적 발상이 그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책은 흑인 페미니즘을 건축 담론과 정면으로 마주 세운다. 저자 자신이 유색인 퀴어 여성으로 미국 도시에서 성장하며 겪은 경험—지금은 사라진 동네를 찾아간 기억, 오래전에 없어진 공업지대에서 클럽에 다니던 기억—을 자전적으로 풀어내며, 이를 회고록이 아니라 소거에 맞서는 ‘어딘가로부터의 시선’으로 자리매김한다.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 Janet Vertesi는 이 책을 “아름답고도 서늘하며, 사려 깊고도 재기 넘치는 역작”이라고 평했다.
이 기사는 아래 원문 보도를 참고해 PHM ZINE이 새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사진과 자세한 내용은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 The Architect’s Newspaper — Erasure by Design (Book Revi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