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평대 집에 살던 이지혜가 지은 지 40년 된 구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새 집은 49평, 이지혜 구축 아파트 리모델링에는 7주가 걸렸다. 한강변 단지지만 저층이라 정작 창밖으로 한강은 보이지 않고, 대신 학교와 단지 안 나무가 보인다. 공사를 마치고 집을 공개하며 그가 꺼낸 말은 “보이기 위한 삶을 그만하자”였다.
평수를 반 가까이 줄였으니 무언가는 내려놓아야 했다. 흥미로운 건 그 목록이다. 현관 앞 화장실, 거실의 TV, 그리고 남편의 방. 보통의 리모델링이라면 가장 먼저 지키려 했을 것들이다. 이 집은 그 자리에 세면대와 책장, 온 가족이 둘러앉는 큰 테이블을 넣었다. 무엇을 덜어냈느냐가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 이 집을 따라 걸어 보면 꽤 선명하게 보인다.

현관엔 화장실 대신 세면대, 귀가 동선이 습관을 만든다
원래 이 집은 현관문을 열면 화장실 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였다. 40년 전 아파트 평면에서 흔한 배치다. 이지혜는 이 화장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면대 하나만 남겼다. 벽을 허무는 구조 변경이라 구청과 아파트에 모두 신고하고 허가를 받은 뒤 순서대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세면대는 레드 톤 석재를 통으로 깎아 낸 듯한 형태다. 본인은 유럽에서 들여온 대리석이라고 소개했는데, 결이 가로로 길게 흐르는 표면은 트래버틴 계열에 가까워 보인다. 무광 실버 수전과 둥근 모서리 거울이 붙어, 화이트 일색인 집에서 유일하게 짙은 색을 쓴 자리다.
현관 세면대는 팬데믹 이후 신축 아파트 평면에 하나둘 등장한 장치다. 핵심은 밖에서 들어오면 손부터 씻는다는 행동을 의지가 아니라 동선에 맡긴다는 점이다. 세면대가 화장실 문 안쪽에 있으면 손 씻기는 ‘해야 할 일’이 되지만, 현관과 거실 사이 길목에 놓이면 지나가다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 된다. 외출하고 돌아온 가족이 신발을 벗자마자 그 앞에 서게 되는 구조다. 공간이 습관을 만드는, 아마 가장 작은 단위의 사례랄까.
아쉬운 점도 있다. 화장실 하나를 없앴으니 손님은 이제 가족 욕실을 써야 한다. 집에 사람을 자주 들이는 가족이라면 꽤 큰 변화다. 레드 석재는 물때와 비누 자국이 잘 보이는 재료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바꿀 생각이라면 석재에 발수 코팅을 해 두고 수전 주변에 물이 고이지 않게 상판 기울기를 확인하자. 공용 욕실이 침실 깊숙이 있는 평면이라면, 화장실을 통째로 없애기보다 변기만 남긴 작은 파우더룸으로 줄이는 쪽이 현실적인 절충이다.

TV를 뺀 서재형 거실, 가족은 책장 앞으로 모인다
거실에는 TV가 없다. 화이트 벽 패널 사이사이에 우드 책장을 세로로 끼워 넣었고, 창가에는 온 가족이 함께 앉는 큰 테이블을 두었다. 자주 꺼내는 책은 우드 칸에 꽂고, 나머지는 화이트 패널 안쪽 수납에 넣는 구성이다. 이지혜는 “남편은 밖으로 끄집어내고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49평으로 줄이면서 남편의 개인 방은 사라졌다. 방이 없어진 사람은 거실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거실에 TV 대신 테이블이 있다는 게 이 집의 설계 의도다.
TV는 거실 가구의 방향을 정하는 물건이다. TV가 있으면 소파는 화면을 향하고, 가족은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앉는다. TV를 빼면 가구가 서로를 마주 보게 되고, 대화든 숙제든 영상 편집이든 같은 테이블 위에서 벌어진다. 몇 년째 30~40대 가구 사이에서 ‘거실 서재화’가 꾸준히 인기를 끄는 이유도 결국 거실의 중심을 화면에서 사람으로 옮기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영상을 끊은 건 아니다. 프로젝터와 전체 소등 버튼을 달아, 필요할 때만 벽 한 면을 스크린으로 쓴다. 테이블은 버튼 하나로 높이가 오르내리는 데스커 모션테이블 포레그, 의자는 같은 브랜드의 D01이다.
아쉬운 건 책을 보여 주는 방식이다. 우드 칸은 폭이 좁고, 넓은 화이트 패널은 문 뒤로 책을 숨긴다. 깔끔하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특히 아이 책은 표지가 보여야 손이 간다. 아이 눈높이에 해당하는 하단 한두 줄은 표지가 정면으로 보이게 진열하는 오픈 선반으로 바꾸고, 손이 덜 가는 책만 닫힌 수납으로 보내는 식으로 나누면 서재형 거실의 취지가 더 살아난다.


천장은 간접조명으로 띄우고, 식탁 위 조명 하나에만 힘을 준다
이 집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조명이다. 거실과 주방 천장 가장자리를 한 단 내려 그 안에 라인 조명을 숨긴 코브 조명을 둘렀고, 안쪽엔 매립 다운라이트를 띄엄띄엄 박았다. 책장 세로 프레임마다 LED 라인이 들어가 책등을 비추고, 거실 벽을 따라 길게 놓인 천연 대리석 벤치 아래에서도 빛이 바닥으로 번진다. 그리고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반투명 막을 씌운 넓적한 버블 펜던트 하나가 걸려 있다. 공사를 맡은 달앤스타일 박지현 소장이 “조명 하나는 비싼 거 사야 한다”고 해서 큰마음 먹고 들였다는 물건이다.
구성만 보면 교과서적이다. 조명은 공간 전체를 밝히는 전반 조명, 책 읽고 요리하는 자리를 비추는 작업 조명, 분위기를 만드는 연출 조명 세 겹이 겹칠 때 깊이가 생긴다. 이 집에선 코브 조명이 전반을, 다운라이트와 침실 독서등이 작업을, 책장 라인과 펜던트가 연출을 맡는다. 천장 간접조명은 빛을 천장면에 한 번 튕겨 보내 눈부심 없이 면을 넓어 보이게 하는데, 층고가 낮은 구축 아파트에서 특히 효과가 크다. 이 집은 원래 천장을 걷어내 높이를 확보했고, 답답하던 주방 천장도 끌어올렸다. 에어컨과 함께 돌리는 실링팬까지 달아 높아진 천장을 끝까지 쓴다.
걸리는 건 빛의 색이다. 영상 속 공용 공간은 전체적으로 화이트에 가까운 차가운 빛으로 보인다. 화이트 벽과 화이트 바닥, 화이트 가구 위에 차가운 빛이 겹치면 낮에는 갤러리처럼 깨끗하지만, 밤에는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는 공간이 된다. 공부와 작업에는 4000K 안팎이 맞지만 저녁 휴식에는 2700~3000K의 웜톤이 편하다. 코브 조명을 색온도 조절형으로 바꾸거나 디머 스위치를 달아, 밤에는 펜던트와 책장 라인만 켜는 ‘저녁 모드’를 따로 만들어 두면 같은 거실이 하루 두 얼굴을 갖게 된다. 빛이 부족한 집이 생활을 어떻게 움츠러들게 하는지는 앞서 소개한 〈낮에도 커튼을 닫는다? 빛이 없는 생활공간〉이 정반대 쪽의 사례다.

주방 벽은 전부 수납으로, 대신 손잡이와 후드를 지운다
리모델링 전 주방은 짙은 상판과 하이글로시 장, 낮은 천장이 겹친 어두운 공간이었다. 지금은 대면형 아일랜드를 가운데 두고 벽 한 면을 손잡이 없는 화이트 키큰장으로 통째로 채웠다. 깊이가 얕은 장은 약 보관장으로, 모서리는 회전 선반을 넣은 코너장으로, 정수기와 커피머신은 문 뒤 오픈 니치로 들어갔다. 천장에 매다는 후드 대신 인덕션 상판에서 연기를 아래로 빨아들이는 다운드래프트 후드를 달았고, 공기 순환 시스템을 함께 설치해 환기를 보완했다. 아일랜드 서랍엔 은은한 조명을 넣었고, 타원형 대리석 식탁 한가운데엔 회전판을 올려 중식당 원탁처럼 반찬을 돌린다.
물건을 문 뒤로 숨기는 히든 수납은 화이트 미니멀 주방의 기본 문법이다. 상부장과 후드가 사라지면 시선이 막힘없이 창까지 이어지고, 같은 면적도 한결 넓어 보인다. 49평에서 80평대 살림을 소화해야 하는 이 집에선 선택이라기보다 필수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만 이지혜 스스로 “적응은 좀 걸린다”고 말할 만큼, 모든 문이 똑같이 생긴 벽은 무엇이 어디 있는지 외우기 전까지 불편하다. 다운드래프트 후드도 따져 볼 지점이 있다. 위로 솟는 연기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방식이라, 볶음이나 구이처럼 연기가 많은 한식 조리에선 천장형 후드보다 포집력이 떨어지기 쉽다. 자주 여는 문 몇 개에만 얇은 라인 손잡이나 다른 톤의 포인트를 주어 일종의 ‘지도’를 만들고, 연기 많은 요리가 잦은 집이라면 창 쪽 보조 환기를 함께 계획하자. 숨긴 수납은 결국 비우는 습관이 받쳐 줄 때만 깔끔함이 유지된다. 이사하며 신발을 꽤 많이 버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이 주방의 진짜 설계도인 셈이다.

노래할 방이 필요하다면, 흡음은 벽 마감으로 해결한다
현관 바로 옆 방은 이지혜의 작업실 겸 연습실이다. 벽을 세로 우드 슬랫으로 감싸고 흡음재와 차음재를 시공해, 노래와 피아노 연습이 가능한 방으로 만들었다. 두 딸은 이 방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하고, 그는 영상 편집을 한다. “집에서 노래하면 신경이 쓰여 연습이 안 됐는데 너무 갖고 싶었던 공간”이라는 말에 이 방의 무게가 실려 있다.
공동주택에서 소리는 가장 예민한 갈등이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방이 없으면 사람은 스스로 목소리를 줄이고, 결국 하고 싶은 일 자체를 줄인다. 가수가 집에서 노래를 참아 왔다는 건 그런 뜻이다. 방음 방 하나가 생기자 연습이 일상으로 돌아오고, 아이들의 악기까지 같은 방으로 들어왔다. 공간이 허락하는 만큼 행동의 반경이 넓어진다는 걸 보여 주는 장면이다.
우드 슬랫은 틈 사이로 들어간 소리를 뒤쪽 흡음재가 잡아 주는 구조라, 마감과 흡음을 한 번에 해결하는 영리한 선택이다. 우드 톤 안에 놓인 블루 암체어 하나가 시선을 붙잡는 포인트 역할도 잘한다. 다만 흡음과 차음은 다른 문제다. 방 안의 울림을 줄이는 건 벽 마감이 하지만, 소리가 밖으로 새는 길은 대개 문틈과 창이다. 비슷한 방을 만든다면 문 하부에 자동으로 내려오는 차음 실을 달고, 창 쪽엔 블라인드 안쪽으로 두꺼운 흡음 커튼을 한 겹 더하는 것이 체감 차이가 크다.

작은 방은 사선으로 넓히고, 아치로 문턱을 낮춘다
둘째의 방은 생각보다 작았다. 공사 도중 작업실과 방 배치를 맞바꿀 만큼 고민이 많았던 자리다. 디자이너는 쓸모없이 남던 벽 쪽 자투리를 사선 벽으로 정리해 방이 넓어 보이게 했고, 수납장 입구엔 부드러운 아치 프레임을 달았다. 가방을 걸 수 있는 손잡이 디테일도 더했다. 첫째의 방은 침대와 책상, 수납을 한쪽 벽에 몰아 가운데를 비웠고, 키에 맞춰 높이를 바꿀 수 있는 모션데스크를 들였다. 두 방 모두 작은 드레스룸이 딸려 있다.
작은 방에서 사선이 효과를 내는 건 방에서 가장 긴 선이 대각선이기 때문이다. 시선이 모서리에서 모서리로 길게 끌려가면 실제보다 깊어 보인다. 아치 같은 곡선은 직각뿐인 아파트에서 긴장을 풀어 주는 장치이고, 아이 방에선 그 자체로 놀이의 입구가 된다.
대신 사선 벽은 가구 배치에서 손해를 본다. 기성 가구가 사선에 딱 붙지 않아 데드 스페이스가 생기기 쉽다. 이 집은 그 자리를 붙박이 선반과 둥근 거울로 메워 손실을 줄였다. 따라 할 거라면 붙박이를 처음부터 사선 각도에 맞춰 짜는 게 전제다. 아이는 금방 자라니 핑크나 원색 포인트는 벽지와 소품으로만 주고, 붙박이 마감은 화이트나 밝은 우드로 남겨 두면 몇 년 뒤 방의 성격을 바꾸기 쉽다.

안방은 패브릭 질감으로 온도를 낮추고, 독서등은 벽에 단다
화이트로 밀어붙인 공용 공간과 달리 안방은 톤이 한 단계 내려간다. 벽 전체를 패브릭 질감의 벽지로 마감하고, 한 면은 베이지 톤 붙박이장으로 채웠다. 침대 옆 벽에는 위치를 옮길 수 있는 블랙 스폿 독서등을 달았다.
침실은 시각 자극을 줄일수록 쉬기 쉬워진다. 패브릭 질감 벽지는 빛을 부드럽게 흩어 반사광을 줄이고, 공용 공간과 다른 재질감 덕에 문을 닫고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바뀐다는 느낌을 준다. 독서등을 벽에 달면 협탁 위가 비고, 잠드는 시간이 다른 부부가 서로의 빛을 방해하지 않는다. 천장등을 끄고 독서등 하나만 켜는 장면이 이 방의 밤이다.
아쉬운 건 붙박이장의 표정이다. 같은 크기의 문이 한 면을 꽉 채우고 있어 방 안 풍경의 절반이 문이다. 문 몇 짝에 패브릭 패널을 덧대 리듬을 주거나, 장 상부와 천장 사이에 웜톤 간접조명을 숨겨 벽을 살짝 띄우면 같은 수납량으로도 방이 덜 답답해진다.

욕실은 한 가지 석재 톤으로 감싸고, 욕조는 조적으로 짓는다
아이들 욕실은 바닥과 벽, 욕조까지 따뜻한 베이지 톤 석재 타일 하나로 감쌌다. 욕조는 기성품을 놓지 않고 벽돌로 쌓아 타일로 마감한 조적 욕조다. 계단처럼 단을 두어 온천에 들어가듯 걸터앉을 수 있다. 천장엔 건조 기능이 있는 환풍기를 달아 습기를 잡았고, 안방 욕실은 오픈형 세면대와 샤워 부스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한 재료로 바닥과 벽, 욕조를 이으면 이음매가 줄어 작은 욕실도 넓어 보이고, 호텔 욕실 같은 일체감이 생긴다. 조적 욕조는 크기와 형태를 집에 맞춰 지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반면 수명은 방수 시공과 줄눈 관리가 결정한다. 매트한 석재 타일은 미끄럼에 강한 대신 물때가 잘 보이니, 줄눈은 오염에 강한 에폭시 계열로 시공하고 욕조 단 옆에 손잡이 바 하나를 두면 아이에게도 나이 든 가족에게도 안전하다.
80평대에서 49평으로 옮기며 이 집이 잃은 건 방 하나와 화장실 하나, 그리고 한강 조망이다. 대신 가족은 한 테이블에 모였고, 가수는 다시 노래할 방을 얻었다. 넓이를 포기하자 무엇을 남길지가 분명해진 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