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의대 건물이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길고 어두운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강의실, 형광등 아래 두꺼운 교재. 맨해튼 북쪽 끝 Washington Heights에 선 Roy and Diana Vagelos Education Center는 그 장면을 정반대로 뒤집은 의과대학 건물이다. 14층 타워의 남쪽 면 전체를 계단과 라운지, 테라스로 채워서, 공부하고 마주치는 공간 자체를 건물의 얼굴로 내세웠다.
설계는 High Line과 The Shed로 잘 알려진 Diller Scofidio + Renfro(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실시설계 파트너는 Gensler(겐슬러)다. 문을 연 건 2016년 8월이니 올해로 꼭 10년이 됐다. 그사이 ‘앉는 계단’과 ‘수직 캠퍼스’는 전 세계 대학과 사옥의 단골 어휘가 됐는데, 이 건물은 그 유행이 본격화되기 전에 한 개 층도 아니고 14개 층 전체를 계단으로 엮어 버렸다. 지금 다시 볼 이유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14개 층을 계단 하나로 꿴 의대 타워
숫자부터 보자. 지상 14층, 높이 67m의 타워다. Columbia University의 의과대학 교육만을 위해 지은 건물로, 2010년 3월 설계공모를 거쳐 2013년 9월 착공했고 2016년 8월 15일 가을 학기에 맞춰 문을 열었다.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남쪽 입면이다. 유리 커튼월 안쪽에서 계단이 지그재그로 꺾이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중간중간 라운지 박스와 테라스가 입면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설계팀은 이 수직의 공용 공간을 ‘스터디 캐스케이드(Study Cascade)’라고 부른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북쪽은 조용하다. 강의실과 실습실이 반듯한 기둥 그리드 위에 차곡차곡 쌓인 쪽이라 입면도 단정하다. 한 건물에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얼굴이 붙어 있는 셈이고, 이 대비가 건물 전체의 논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병원 동 사이, 38m×30m짜리 땅에서 시작된 수직 캠퍼스
건물이 선 곳은 지금은 Columbia University Irving Medical Center(CUIMC)라 불리는 의료 캠퍼스, 주소로는 Haven Avenue 104번지다. 병원 동과 고층 주거가 빽빽한 맨해튼 북단 언덕이라 쓸 수 있는 땅이 약 38m×30m에 불과했다. 저층부 바닥판이 약 1,161m², 타워부 한 층은 약 557m² 수준이다.
캠퍼스를 옆으로 펼칠 수 없으니 위로 쌓을 수밖에 없었다. Elizabeth Diller(엘리자베스 딜러)는 이 건물을 ‘아기 타워’라고 부르며, 부지의 제약을 오히려 단면으로 짜인 공간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고 설명한다. 평면으로 넓히지 못한 학교를 단면으로 펼친 셈이다.
대신 높이가 주는 보상이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서쪽으로 허드슨강과 건너편 Palisades 절벽, 북쪽으로 George Washington Bridge가 펼쳐진다. 뒤편의 큰 테라스는 이 풍경을 함께 누리도록 열어 둔 공용 공간이다.
건물 이름은 기부자에게서 왔다. Merck 회장을 지낸 Roy Vagelos는 이 학교 1954년 졸업생으로, 2010년 아내 Diana와 함께 이 건물을 위해 5,000만 달러를 내놨다. 부부는 2017년 다시 2억 5,000만 달러를 기부했고, 의과대학 이름까지 Vagelos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로 바뀌었다.

남쪽 입면 전체가 계단, 뉴욕 의대의 ‘스터디 캐스케이드’
스터디 캐스케이드는 층마다 바닥을 조금씩 어긋나게 잘라 내고, 그 틈을 계단으로 이어 1층 로비부터 꼭대기까지 하나의 연속된 공용 공간을 만든다. 계단 옆에는 계단식 라운지, 소규모 회의실, 두세 개 층이 트인 휴게 공간, 바깥 테라스가 차례로 붙는다. 이동하는 길이 그대로 공부하고 쉬는 장소가 되는 구조다.
흥미로운 건 설계자가 이 구조의 ‘비효율’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Elizabeth Diller는 캐스케이드가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이며, 모든 면적을 쥐어짜기보다 빛과 공간의 질을 택했다고 말한다. 건축에서 흔히 말하는 전용률, 즉 전체 면적 가운데 실제로 방으로 쓰는 면적의 비율을 일부러 손해 보고 들어간 셈이다.
계단을 건물의 얼굴로 내세우는 전략은 이후 상업 공간에서도 자주 보인다. 앞서 소개한 〈레드 나선계단이 파사드가 된 방콕 카페, Harudot Thonburi〉처럼 작은 카페도 계단을 파사드로 꺼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다. 다만 Vagelos Education Center는 그걸 1개 층이 아니라 14개 층 높이로, 그것도 의대라는 가장 보수적인 프로그램에서 해냈다는 점이 다르다.

복도를 버린 평면, 조용한 북쪽과 시끄러운 남쪽
평면을 읽으면 조닝이 선명하다. 엘리베이터와 코어를 가운데 두고, 북쪽 약 3분의 2에는 강의실·실습실·사무실 같은 ‘조용한 방’을, 남쪽 3분의 1에는 캐스케이드라는 ‘시끄러운 길’을 몰았다. 강의실은 규칙적인 구조 그리드 위에 놓이고, 30~60명 규모의 액티브 러닝 강의실은 접이식 칸막이로 나누거나 합칠 수 있다.
설계 초기 스케치를 보면 이 배치가 어디서 나왔는지 보인다. 보통 학교 건물은 공용 공간을 1층에 깔고 그 위에 강의실, 맨 위에 사무실을 쌓는다. 이 건물은 그 공용 공간을 바닥에서 떼어 내 세로 띠로 세웠다. 로비에만 몰려 있던 북적임을 꼭대기 층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전통적인 학교 평면은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옆에 교실을 붙이는 ‘중복도’ 방식이다. 효율은 좋지만 복도는 그냥 지나가는 통로로 끝난다. 이 건물은 그 복도를 없애고 남쪽으로 몰아 계단과 라운지로 부풀렸다. 〈복도 없는 유치원, Redhill Early Learning Centre〉가 낮고 넓은 땅에서 복도를 지웠다면, 여기서는 좁고 높은 땅에서 같은 질문을 수직으로 풀었다고 보면 된다.
조용한 방과 시끄러운 길을 코어로 갈라 둔 건 소리 문제 때문에도 중요하다. 열린 계단은 사람과 함께 소리도 실어 나르기 때문에, 집중이 필요한 강의실을 같은 켜에 섞었다면 캐스케이드의 활기가 그대로 소음이 됐을 것이다.

이 형태는 어디서 왔나 — 접힌 띠, 그리고 ‘보고 보이는’ 계단의 계보
Diller Scofidio + Renfro는 원래 바닥을 평평한 판이 아니라 접고 구부릴 수 있는 띠로 다뤄 온 사무소다. 바닥과 벽이 하나로 이어지며 굽이치는 구상은 지어지지 못한 2004년 Eyebeam 미술·기술 박물관 계획안에서 이미 시험한 바 있다. 낡은 철로를 걷는 공원으로 바꾼 High Line 역시 지면을 들어 올리고 접어서 앉고 눕는 자리로 만든 작업이다. 이 사무소에게 공공 공간은 평면이 아니라 단면에서 만들어진다.
남쪽 입면을 감싼 GFRC(유리섬유 보강 콘크리트) 띠가 층마다 다른 각도로 꺾이는 것도 이 계보에서 읽힌다. 띠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자리마다 라운지와 테라스가 걸리니, 외관의 리듬은 곧 내부 프로그램의 지도다. 장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면도를 입면에 그대로 펼쳐 놓은 셈이다.
계단을 사교의 무대로 쓰는 생각 자체는 오래됐다. 19세기 Palais Garnier(파리 오페라 극장)의 대계단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이면서, 관객들이 서로를 구경하고 자신을 보여 주는 무대였다. 스터디 캐스케이드는 그 ‘보고 보이는’ 계단을 의대생의 일상으로 옮겨 온 것에 가깝다. 다른 층에서 공부하는 동료가 유리 너머로 보이고, 계단참에서 교수와 마주치는 일이 하루에도 여러 번 생긴다.

해부실과 모의 수술실, 의학교육이 바뀌자 의대 건물이 바뀌었다
의대 교육은 지난 20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 큰 강당에서 받아 적는 수업 비중이 줄고, 소그룹 토론과 팀 단위 문제 해결, 모형과 시뮬레이터로 하는 실습이 늘었다. 이 건물의 프로그램 목록이 그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시뮬레이션 센터에는 접수 공간, 디브리핑실, 모의 진찰실과 진료실, 모의 수술실이 들어간다. 실제 병원과 같은 동선을 건물 안에 재현해 놓고 그 안에서 연습한 뒤, 바로 옆방에서 방금 한 걸 되짚어 보는 구조다. 해부 실습실인 ‘아나토미 쿼드(Anatomy Quad)’에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붐과 모니터, 작업 조명이 설치돼 있고, 유리 외벽에는 반투명 처리를 해 빛은 들이되 안은 보이지 않게 했다.
강당은 275석 규모이고, 190명이 들어가는 다목적 행사 공간도 따로 있다. 거대한 강당 하나와 작은 방 여럿이라는 구성은 ‘한꺼번에 듣는 수업’과 ‘쪼개져서 하는 수업’을 한 건물 안에서 오가게 하려는 배분이다. 의대 건물인데 실습 공간과 라운지가 강의실만큼이나 많다는 점이 이 건물의 성격을 말해 준다.

앉는 계단 위에서 생기는 우연한 마주침
캐스케이드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머무는 곳은 계단식 라운지다. 7~8층과 11~12층에 두 개 층을 잇는 스탠드형 라운지가 들어가는데, 계단 몇 단을 넓혀 걸터앉을 수 있게 만든 자리라 노트북을 펴면 열람실이 되고 앞에 화면 하나를 세우면 즉석 강의실이 된다.
여기에 카페와 라운지 좌석, 발코니가 붙은 두 개 층 높이의 학생 커먼스, 학생 전용 ‘스카이 라운지’, 로비의 카페와 스터디 바까지 더하면 사실상 건물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휴게실이 된다. 설계의 목표는 명확하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타게 만들고, 그 길에서 다른 학년·다른 전공 사람과 부딪히게 하는 것이다.
공간이 행동을 바꾸는 방식도 흥미롭다. 남이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는 자리에서는 혼자 있을 때보다 덜 지루하고 덜 고립된다고 느낀다. 요즘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와 같은 원리다. 이 건물은 그 카페 감각을 의대 안으로 들여와, 혼자 하는 공부와 함께 하는 공부 사이의 문턱을 낮춘다.

기둥 두 개로 버티는 남쪽, 유리 상자 속 의대 강당
계단이 층마다 바닥을 뚫고 지나가려면 남쪽에 기둥이 거의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남쪽 절반은 단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그 기둥 안에는 강도를 높이려고 철골을 묻었다. 바닥은 포스트텐션 철근콘크리트 슬래브라 바깥으로 길게 내밀 수 있고, 슬래브 속에는 무게를 줄이는 중공 성형재를 넣었다. 기울어진 노출콘크리트 기둥이 계단 옆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장면이 그래서 나온다.
남향 유리는 햇빛이 좋은 만큼 열부하도 크다. 커튼월은 저철분 로이유리를 유리 핀으로 세운 방식이고, 북쪽 끝에는 세라믹 프릿(유리에 인쇄한 점무늬)을 입혔다. 고정식·가동식 차양으로 일사를 조절하고, 옥상 녹화와 자생 식물 조경까지 더해 LEED Gold 인증을 받았다. 그래도 전면 유리 타워가 냉방에 불리하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공용 공간의 즐거움과 에너지 부담을 맞바꾼 선택이다.
저층부 강당은 유리벽 너머로 거리가 그대로 보인다. 강의를 듣다 고개를 들면 Washington Heights의 아파트 블록이 무대 배경처럼 걸려 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수업 장면이 쇼윈도처럼 보인다. 의대가 동네를 향해 자기를 열어 보이는 장면이다.

밤이 되면 등불이 되는 계단, 의대 인테리어의 재료와 조명
인테리어는 재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거친 노출콘크리트, 따뜻한 더글러스 퍼 원목 베니어, 그리고 러스트 톤 테라조다. 캐스케이드의 벽과 천장은 더글러스 퍼 패널로 마감하고, 바닥은 원목 엔드그레인 마루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의 테라조로 나눴다. 차갑게 비어 보이기 쉬운 유리 타워 안쪽을 나무와 러스트, 오렌지 톤으로 데워 놓은 조합이다.
조명은 Tillotson Design Associates가 맡았다. 낮에는 남쪽 통유리가 자연광을 깊숙이 들이고, 해가 지면 나무 천장에 매립한 다운라이트가 계단을 따라 점점이 켜진다. 빛이 나무 면에 한 번 부딪혀 돌아오면서 따뜻한 웜톤으로 번지는데, 이게 밖에서 보면 타워 전체가 지그재그로 켜진 등불처럼 보이는 이유다. 반면 해부 실습실처럼 손끝 작업이 중요한 공간은 천장 붐에 단 밝은 작업 조명으로 확실히 갈랐다.
조명 설계의 기본은 전반 조명, 작업 조명, 연출 조명 세 겹을 겹쳐 까는 것이다. 이 건물도 머무는 계단과 라운지에는 나무 천장을 타고 퍼지는 웜톤의 은은한 빛을, 손끝 작업이 중요한 실습실에는 또렷한 작업광을 배분해 공간마다 다른 긴장도를 만든다. 웜톤은 쉬는 자리에, 4000K 이상의 화이트 톤 빛은 집중하는 자리에 어울린다는 일반 원칙과 그대로 맞물린다. 짙은 나무 마감은 빛을 먹기 때문에 같은 밝기라도 더 어둡고 아늑하게 읽힌다는 점도 계산에 들어가 있다.
집이나 작은 사무실에 옮겨 볼 만한 포인트도 있다. 오래 머무는 자리는 2700~3000K 전구로 바꾸고, 짙은 원목 천장이나 벽이 있다면 그 면을 비추는 간접 조명을 하나 더하면 같은 공간도 훨씬 깊어 보인다. 책상 위만큼은 4000K 안팎의 밝은 스탠드로 분리해 두는 게 이 건물이 실습실과 라운지를 나눈 방식과 같다.

10년 뒤 다시 보는 Vagelos Education Center
2016년 이후 계단을 공용 공간으로 키우는 설계는 하나의 공식이 됐다. 대학 건물마다 계단식 라운지가 들어서고, 테크 기업 사옥 로비에는 앉을 수 있는 대계단이 표준처럼 놓인다. 뉴욕 안에서도 The New School의 University Center처럼 입면에 계단을 드러낸 대학 건물이 먼저 나왔고, 페루 리마의 UTEC처럼 땅이 부족한 도시에서 캠퍼스를 수직으로 쌓는 사례도 같은 시기에 나왔다.
그 흐름 속에서 이 건물이 여전히 돋보이는 건, 계단을 장식이나 로비의 한 장면으로 쓰지 않고 건물 단면 전체의 뼈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동, 공부, 휴식, 마주침이 한 줄로 꿰어져 있고, 그 줄이 그대로 외관이 된다. 요즘 많이 보이는 ‘인스타용 계단’과 갈리는 지점이 여기다.
물론 대가도 있다. 전용률을 포기한 만큼 같은 면적에 넣을 수 있는 방은 줄었고, 남향 전면 유리는 유지관리와 냉방 부담을 안고 간다. 계단이 정말 활발하게 쓰이려면 층간 거리가 걸어 오를 만해야 하는데, 14개 층 전부를 계단으로만 오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건물의 진짜 성과는 ‘모두가 계단을 탄다’가 아니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몇 개 층만 걸어도 다른 사람들의 공부가 보이게 만든 데 있다.
뉴욕 의대라는 가장 보수적인 교육 공간에서, 복도 대신 계단을, 효율 대신 마주침을 고른 결정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과감하다. 해 질 녘 Haven Avenue에서 올려다보면 그 결정이 지그재그 불빛으로 고스란히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