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을 접어 산을 담았다, House SP

남향으로 트인 산자락 도시, Meran. Italy 북부 South Tyrol에 있는 이 도시는 알프스 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어느 집이든 창만 제대로 내면 풍경 하나는 확실히 챙길 수 있다. 문제는 오래된 집들이 대개 그 풍경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는 것이다. monovolume architecture + design이 손댄 House SP도 그런 집이었다. 이미 지어져 있던 주거 건물을 뜯어고쳐 두 세대로 나눴는데, 방식이 꽤 과감하다. 1층과 다락을 아예 헐어내고 다시 지었다. 지상층은 남기되 외벽만 새로 입혔고, 그 위로 넓은 아파트 한 채와 2·3층을 쓰는 듀플렉스 한 채를 얹었다.
흰 매스에 검은 외부 계단이 붙은 하우스 SP 외관
© Giovanni De Sandre

흰 벽에 검은 선을 그었다

외관의 규칙은 단순하다. 벽은 흰색 미장, 그 위에 얹히거나 붙는 것들은 전부 검정. 지붕 처마를 따라 검은 띠가 한 줄 지나가고, 그 아래로 외부 계단이 사선으로 내려온다. 창틀도 검정이다. 두 가지 색만 쓰면서도 밋밋해 보이지 않는 건 검은 요소들이 전부 선 아니면 면으로 정리돼 있기 때문이다. 계단은 사선, 처마는 수평선, 창은 사각형 면. 흰 배경 위에 도형을 배치한 그림처럼 읽힌다. 리노베이션에서 이 방식이 특히 유효한 이유가 있는데, 기존 건물의 어정쩡한 비례나 어긋난 창 위치를 흰색으로 한 번 덮어 정리한 뒤 새로 더한 것들만 검정으로 강조하면 옛것과 새것의 경계가 명확해진다. 예산이 빠듯한 리모델링에서도 써볼 만한 접근이다.
검은 금속 루버로 감싼 외부 계단 디테일
© Giovanni De Sandre

계단을 밖으로 빼낸 이유

가까이서 보면 이 계단이 그냥 계단이 아니다. 세로 살을 촘촘히 세워 만든 검은 금속 스크린이 계단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오르내리는 사람은 밖에서 훤히 보이지 않고, 안쪽에서는 살 사이로 바깥이 보인다. 한 건물을 두 세대로 나눌 때 가장 골치 아픈 게 진입 동선이다. 실내에 공용 계단실을 만들면 두 집 모두 면적을 뺏기고, 현관에서 마주칠 일도 생긴다. 계단을 바깥으로 빼면 그 손해가 사라진다. 다만 외부 계단은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고, 겨울에 얼면 위험하다. 이 집이 계단을 스크린으로 감싼 건 시선 차단만이 아니라 그 문제를 어느 정도 덜어내려는 선택으로도 보인다. 국내에서 다가구 주택을 지을 때도 참고할 만한데, 다만 우리 기후에서는 눈·비 대응을 더 확실히 잡아야 한다.
호두나무 가지 쪽으로 열린 다이닝 테라스
© Giovanni De Sandre

오래된 호두나무를 중심에 두고

1층과 2층에 걸친 테라스는 마당에 서 있던 오래된 호두나무 가지 사이로 펼쳐진다. 나무를 피해 집을 앉힌 게 아니라, 나무가 있는 자리로 테라스를 밀어 넣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유리문을 열면 다이닝 공간이 그대로 테라스로 이어지고, 시야 끝에는 나뭇잎이 걸린다. 이 집에서 가장 값진 게 뭐냐고 물으면 아마 이 나무일 것이다. 새로 심은 조경수가 이만한 그늘과 높이를 갖추려면 수십 년이 걸린다. 리노베이션의 이점이 여기 있다. 새로 짓는 집은 땅을 정리하면서 기존 나무를 베어내기 쉽지만, 기존 건물을 고치는 경우엔 이미 자란 나무를 그대로 안고 갈 수 있다. 마당에 오래된 나무가 있는 집을 고칠 계획이라면, 그 나무를 어떻게 살릴지부터 정하고 평면을 짜는 순서가 낫다.
벽난로를 사이에 둔 다이닝 공간과 구리 펜던트
© Giovanni De Sandre

벽난로가 벽 노릇을 한다

실내로 들어오면 흰 볼륨 하나가 공간 한가운데 서 있다. 정면은 벽난로, 옆면에는 장작을 쌓아 두는 세로 홈이 파였다. 이 볼륨을 경계로 한쪽은 복도, 반대쪽은 다이닝이다. 벽을 세우는 대신 설비 하나를 덩어리로 만들어 공간을 나눈 방식인데, 개방감을 잃지 않으면서 영역은 확실히 구분된다. 다이닝 위로는 구리색 와이어 펜던트 두 개가 낮게 걸렸고, 창에는 목재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다. 흰 벽과 오크 바닥이 기본 톤을 잡고 구리와 목재가 온기를 얹는 구성이라, 색을 많이 쓰지 않고도 차가워 보이지 않는다. 미니멀한 인테리어가 병원처럼 느껴지는 집들이 흔한데, 그 차이는 대개 이런 금속 하나, 조명 하나에서 갈린다.
돌 상판과 유리 수납장으로 마감한 주방
© Giovanni De Sandre

손잡이를 다 없앤 주방

주방은 흰 면으로 정리됐다. 상부장이든 하부장이든 손잡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조리대와 아일랜드 상판은 회색 결이 굵게 지나가는 돌이다. 하부장 아래와 상부장 밑에 간접 조명을 넣어 상판 위를 밝혔다. 눈에 띄는 건 오른쪽 끝의 유리 수납장이다. 검은 프레임에 유리문을 달고 안쪽에 조명을 넣어, 잔과 술병이 진열장처럼 보이게 했다. 전부 감추는 주방에서 이 한 칸만 열어 둔 셈인데, 감추기만 하면 공간이 지나치게 무표정해지기 때문에 이런 장치가 하나쯤 필요하다. 다만 유리장은 안이 훤히 보이는 만큼 정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일상적으로 쓰는 그릇 말고 보여줘도 되는 것만 넣을 자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경사 천장 아래 계단 보이드를 낀 듀플렉스 상층 거실
© Giovanni De Sandre

지붕이 접히는 자리에 생긴 천장

듀플렉스 위층에 올라오면 천장이 평평하지 않다. 지붕이 꺾이는 선을 그대로 실내에 드러내서, 천장면이 여러 방향으로 기울어지며 만난다. 그 경계를 따라 간접 조명을 심어 놓아 밤에는 천장 자체가 빛나는 면이 된다. 가운데는 계단 보이드로 뚫려 있고 검은 금속 난간이 둘렀다. 아래층 빛이 위로 올라오고, 위층 소리가 아래로 내려간다. 벽에 걸린 커다란 세계지도와 청록색 소파가 이 층의 색을 담당하는데, 흰 천장과 밝은 오크 바닥이 워낙 중성적이라 이 정도 색은 충분히 받아준다. 경사 천장을 살린 공간에서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가구까지 강하게 가는 것이다. 천장이 이미 복잡한 형태를 만들고 있으면 가구는 오히려 단순한 편이 낫다.
산과 마을을 담은 옥상층 파노라마 창
© Giovanni De Sandre

풍경을 액자에 넣는 방법

맨 위층의 창은 사각형이 아니다. 위쪽 모서리가 지붕 경사를 따라 비스듬히 잘려서, 창틀 자체가 사선을 그린다. 그 너머로 Meran을 둘러싼 산과 마을이 통째로 들어온다. 붉은 첨탑 하나가 화면 한가운데쯤 걸리는데, 우연이라기엔 자리가 절묘하다. 풍경이 좋은 집에서 창을 크게 내는 건 당연하다. 여기서 눈여겨볼 건 창의 크기가 아니라 형태다. 사각 통유리로 냈다면 풍경은 똑같이 보였겠지만 지금처럼 “액자에 담긴” 느낌은 안 났을 것이다. 창틀이 지붕선과 같은 각도로 기울면서 바깥 풍경과 건물 형태가 한 화면에서 연결된다. 전망이 좋은 땅에 집을 짓는다면 창을 얼마나 크게 낼지보다 어떤 모양으로 자를지를 먼저 고민해 볼 만하다.
태양광 패널을 얹은 지붕과 옥상 테라스 야경
© Giovanni De Sandre

옥상 전체가 거실의 연장

꼭대기 층은 실내와 옥상 테라스가 유리문 하나로 이어진다. 문을 열어 두면 소파가 놓인 거실과 야외 다이닝이 하나의 공간처럼 쓰인다. 테라스 가장자리에는 나무와 관목을 심어 화단을 둘렀는데, 덕분에 옥상인데도 마당에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가 지고 실내 조명이 켜지면 이 층 전체가 등처럼 빛난다. 유리면이 넓은 집에서만 나오는 장면이라 사진으로는 근사한데, 반대로 말하면 밤에 안이 다 들여다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집은 주변보다 높이 올라앉아 있어서 문제가 덜하지만, 이웃과 눈높이가 비슷한 곳이라면 커튼이나 조경으로 대비를 해 둬야 한다.
태양광 패널과 옥상 테라스를 내려다본 항공 사진
© Giovanni De Sandre

지붕은 발전소, 그 안쪽은 마당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집의 지붕이 어떻게 쓰이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경사면은 전부 태양광 패널로 덮였고, 그 패널들이 ㄱ자로 감싼 안쪽이 테라스다. 발전 설비와 야외 생활공간이 한 지붕 위에서 자리를 나눠 가진 셈이다. 이 집은 파사드와 창을 삼중으로 단열하고 히트펌프를 들여 냉난방을 해결한다. 여기에 지붕 발전까지 더해 에너지 부담을 낮췄다. 태양광 패널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꺼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처럼 지붕 형태를 짤 때부터 패널 자리를 계획에 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중에 얹으면 덧붙인 티가 나지만, 처음부터 지붕면의 일부로 설계하면 검은 마감재 중 하나로 읽힌다.
작은 창만 낸 닫힌 파사드와 외부 계단
© Giovanni De Sandre

한쪽은 닫고 한쪽은 열고

이 집에서 창이 시원하게 열린 쪽은 정원 방향이다. 반대편, 그러니까 북쪽 도로를 마주하는 파사드는 의도적으로 닫아 뒀다. 도로 소음을 막고 프라이버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사방으로 창을 내는 게 늘 정답은 아니다. 특히 도심이나 도로변에서는 방향마다 조건이 달라서, 다 열면 소음과 시선까지 함께 들어온다. 열 곳과 닫을 곳을 나누는 판단이 창 크기보다 중요할 때가 많은데, 이 집은 그 선택을 꽤 분명하게 했다. 어느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좋은 쪽으로만 크게 여는 것. 리노베이션이든 신축이든 순서는 같다.

건축사무소: monovolume architecture + design
위치: Meran, South Tyrol, Italy
준공연도: 2025
자재: 백색 미장, 검은 금속, 삼중유리
시공: Hafner EC
조명: Eurolicht
분류: 단독주택 리노베이션·증축(2세대)
사진: Giovanni De Sandre

Architectsmonovolume architecture + design
PhotosGiovanni De Sandre
ContractorHafner EC
Country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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