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보드 위에서 그린 스케치가 집이 됐다, Malibu Wave House

말리부 해변에 파도 모양 지붕을 얹은 집이 있다. 이름도 군더더기 없이 Wave House다. 2024년 8월, 이 집의 주인이 모델 Karlie Kloss와 벤처투자자 Josh Kushner 부부로 바뀌었다. 거래가는 2,95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이 넘는다.

숫자만 보면 통 큰 거래 같지만 실은 반값 세일에 가까웠다. 2023년 여름 시장에 나올 때 붙은 호가가 4,950만 달러였으니 2,000만 달러가 깎인 것이다. 452일. 이 집이 새 주인을 찾는 데 걸린 시간이다. 해안의 아이콘이라는 명성과 실제로 지갑을 여는 일은 아무래도 다른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가격표가 아니다.

말리부 해안선 위에서 내려다본 Wave House 전경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서핑보드 위에서 그린 스케치 한 장

집을 설계한 사람은 Harry Gesner다. 정식 건축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캘리포니아 해안에 기묘한 집들을 남긴 인물인데, 평생 서퍼이기도 했다. 이 집의 첫 그림도 책상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나왔다. 보드를 타고 앞바다까지 나가 뭍을 돌아보며 그리스펜슬로 보드 위에 스케치를 했다는 이야기다. 전설처럼 들리지만 본인이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 말한 내용이다.

완성은 1957년. 의뢰인은 그와 함께 파도를 타던 친구 Glenn·Gerry Cooper 부부였다. 곡선으로 휜 집성재 보를 세우고 그 위에 물고기 비늘 같은 슁글을 덮어, 지붕 끝이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처럼 앞으로 말려 나가게 만들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Jørn Utzon이 이 집을 보고 Gesner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라고 두 사람 다 부인했지만.

집은 땅 위가 아니라 모래 위 콘크리트 기둥에 올라타 있다. 해안 침식이 심해지면서 기둥을 보강해야 했을 만큼 파도와 가까운 자리다. 바다를 보는 집이 아니라 바다 안에 발을 담근 집이랄까. 이 위치가 이 집의 모든 매력과 모든 부담을 동시에 만든다.

유리문 너머로 거실과 바다가 일직선으로 보이는 Wave House 현관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현관을 열면 바다가 액자처럼 걸린다

현관 사진을 보면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금방 안다. 유리 여닫이문 → 짧은 복도 → 사각으로 뚫린 개구부 → 거실 → 통유리 → 수평선. 여섯 겹을 지나는데 시선은 한 번도 꺾이지 않는다. 문을 여는 순간 바다가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정면에 나타나는 구조다.

여기서 진짜 잘한 건 바다를 보여준 게 아니라 한 번 좁혀서 보여줬다는 점이다. 복도 끝 사각 개구부가 시야를 일부러 잘라내기 때문에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화면이 확 넓어지는 느낌이 생긴다. 진입부에서 집의 최고 장면을 통째로 다 보여주면 처음 3초는 강렬하지만 그다음부터 심심해진다. 좋은 동선은 시선을 살짝 가렸다가 푼다.

이 원리는 바다가 없는 집에도 그대로 쓸 수 있다. 국내 아파트 현관은 대개 신발장이 정면을 막고, 중문은 불투명이고, 그래서 문을 열면 벽부터 보인다. 중문을 유리로 바꾸고 현관 정면축 끝에 창이나 밝은 벽면 하나를 놓아주면 같은 장치가 된다. 현관에 큰 거울을 다는 것보다 시선이 끝까지 통과할 축을 하나 만들어주는 쪽이 실제 체감 면적을 훨씬 키운다.

곡선 천장 아래 원형 소파와 벽난로가 놓인 Wave House 거실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거실 한가운데를 파낸 이유

거실은 바닥을 세 단 파 내려간 원형 대화 피트다. 가운데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놓이고, 그 둘레를 붙박이 소파가 감싸고, 정면에는 조각처럼 생긴 흰 벽난로가 서 있다. 천장은 곡선 서까래, 소파도 곡선, 테이블도 원형. 형태 언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다.

바닥을 파낸 실질적인 이유는 시선 높이에 있다. 앉은 사람의 눈높이가 내려가면 통유리 아래쪽으로 모래사장이 빠지고 수평선만 남는다. 창을 키우지 않고도 바다를 더 많이 갖는 방법인 셈이다. 여기에 벽난로를 바다 쪽에 세워 불과 파도를 한 화면에 넣었다. 60년 전 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계산이다.

물론 대가도 있다. 세 단짜리 단차는 아이와 노인에게 위험하고, 붙박이 소파는 가구 배치를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패브릭이 늙으면 갈아 끼우는 비용도 일반 소파와 비교가 안 된다. 국내 거실에서 이걸 그대로 따라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러그로 영역을 잘라내고 등받이 낮은 소파와 좌식 테이블을 쓰면 단차 없이도 ‘내려앉은 자리’의 느낌은 만들어진다. 조명을 천장이 아니라 눈높이 아래로 내리는 것만으로도 공간은 꽤 아늑해진다.

해질 무렵 조명이 켜진 Wave House 거실

출처: Carolwood Estates

유리가 많은 집일수록 밤이 어렵다

같은 거실을 해질 무렵에 찍은 사진이다. 낮 사진과 나란히 놓고 보면 조명 계획이 얼마나 신중한지 드러난다. 천장 다운라이트는 거의 꺼져 있고, 바닥 가까이 놓인 원통형 조명 몇 개와 낮은 간접조명이 전부다. 덕분에 창밖에 남은 푸른 하늘색이 그대로 살아 있다.

유리가 많은 집은 밤에 배신당하기 쉽다. 실내가 바깥보다 밝아지는 순간 통유리는 전부 거울로 변한다. 수십억을 들여 확보한 바다 전망이 밤마다 내 얼굴과 천장등 반사로 채워지는 것이다. 해법은 단순하다. 조명을 눈높이보다 낮게 깔고, 창가 1미터 안쪽은 되도록 밝히지 않고, 전체 조도를 낮추는 것. 이 집은 그 원칙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

야경이 있는 국내 아파트라면 더 쉽게 적용된다. 거실 메인등을 끄고 플로어 스탠드 두세 개로 낮게 깔면 창이 다시 창으로 돌아온다. 색온도는 2700K 안팎의 따뜻한 쪽으로 통일하는 편이 바깥 어둠과 부딪히지 않는다.

삼각형 유리창 아래 둥근 원목 식탁이 놓인 Wave House 다이닝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형태가 강한 공간에서는 가구가 조용해야 한다

다이닝은 지붕 곡선이 가장 격렬하게 드러나는 자리에 있다. 창틀이 삼각형으로 솟았다가 아래로 휘어 내려오고, 그 사선 아래에 둥근 원목 테이블과 페이퍼코드 좌판의 목재 의자 여섯 개가 놓였다. 장식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이게 정답이다. 창과 천장이 이미 저렇게 큰 소리를 내고 있는데 가구까지 개성을 주장하면 공간이 시끄러워진다. 형태가 강한 공간일수록 가구는 조용해야 하고, 재료 톤은 좁게 묶어야 한다. 여기서는 바닥·테이블·의자가 전부 한 계열 목재고, 나머지는 흰색과 유리다. 결과적으로 눈에 남는 건 가구가 아니라 창이 잘라낸 하늘과 바다다.

둥근 테이블을 고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선과 곡선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직사각형 테이블은 필연적으로 어느 한 변과 어긋난다. 국내 주택에서도 다이닝이 좁거나 벽이 사선일 때 원형이 유리하다. 모서리가 없으니 지나다닐 때 통로 폭을 덜 잡아먹고, 의자 수를 하나 늘려 앉기도 쉽다. 다만 벽에 붙여 쓰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수해야 한다.

창가 붙박이 벤치와 라탄 의자가 놓인 Wave House 휴식 공간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오브제는 공간의 크기를 이긴다

창가에 붙박이 벤치를 길게 앉히고 쿠션 몇 개를 던져둔 자리다. 옆에는 라탄 좌판의 벤트우드 의자, 앞에는 나무 원통을 그대로 쓴 수납 스툴, 그 위에 커다란 수정 원석이 올라가 있다. 창밖으로는 뒤틀린 해안 나무가 그림처럼 걸린다.

붙박이 벤치는 이 집에서 가장 따라 하기 쉬운 장치다. 소파처럼 자리를 잡아먹지 않으면서 앉을 자리를 늘리고, 아래를 수납으로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창을 등지지 않고 바라보게 만든다. 국내 아파트에서 확장한 베란다 자리에 상부장을 다는 대신 낮은 벤치를 짜 넣으면 같은 효과가 난다. 깊이는 45cm 안팎이면 충분하고, 등받이는 벽에 쿠션을 기대는 것으로 대신하면 된다.

반면 저 수정 원석은 그대로 가져오면 곤란한 물건이다. 오브제는 크기 자체보다 주변 여백과 마감재에 따라 인상이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창이 큰 이 집에서는 원석 하나가 조각처럼 읽히지만, 같은 물건을 30평대 거실 선반에 올리면 그냥 부피 큰 돌이 된다. 공간이 넉넉한 집은 오브제에 맞춰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그럴 여유가 없다. 통일감이 흔들린다면 안 맞는 오브제를 과감히 빼는 것도 충분히 좋은 선택이다.

곡선 원목 벤치와 물고기 비늘 모양 지붕이 보이는 Wave House 데크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이 난간은 록스타가 만든 것이다

바다 쪽으로 돌아나가는 데크에는 곡선으로 휜 원목 벤치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 뒤로 구리 슁글 지붕 끝이 파도처럼 말려 내려온다. 그리고 데크를 감싼 가느다란 금속 난간 — 이건 원래 이 집에 없던 물건이다.

Gesner는 발코니를 난간 없이 열어두었다. 1970년대에 이 집을 사들인 사람이 Rod Stewart였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그는 Gesner에게 난간 디자인을 따로 의뢰했다. 그래서 지금 데크를 두르는 저 곡선 난간은 록스타의 요구로 추가된, 설계 20년 뒤의 물건이다. 1987년부터 2022년까지 집을 가졌던 워너뮤직의 Mo Ostin은 자갈이던 지붕을 구리 슁글로 바꿨다. 이 집의 지금 모습은 한 사람의 설계가 아니라 세 세대의 손이 겹친 결과인 셈이다.

소재를 보면 관리에 대한 태도도 읽힌다. 티크 계열 원목과 구리는 바닷바람과 염분 앞에서 반드시 색이 변한다. 구리는 푸르게 뜨고 목재는 은회색으로 바랜다. 이걸 매년 오일을 먹여 원래 색으로 되돌리는 집도 있고, 변색을 그냥 시간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집도 있다. 이 집은 후자를 택했다. 국내 주택에서 해가 세게 드는 데크를 짤 때도 같은 질문을 먼저 하는 편이 낫다. 매년 손볼 자신이 없다면 방부목보다 열처리목이나 합성목이 결국 덜 후회한다.

소유자: Karlie Kloss(모델)·Josh Kushner(Thrive Capital 창업자) 부부
위치: Malibu, California, USA
면적: 연면적 약 6,451ft²(약 599㎡), 대지 0.7에이커(약 2,830㎡)
특징: 1957년 Harry Gesner 설계, 침실 6·욕실 8, 곡선 집성재 보와 구리 슁글 지붕, 2024년 8월 2,950만 달러 거래(최초 호가 4,950만 달러)
출처: Robb Report · 사진: Berlyn Photography, Carolwood Estates, Artnet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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