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카(Wānaka)는 뉴질랜드 남섬에서도 손꼽히는 호수·산악 휴양지로,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동네다. 이 동네에 20년 넘게 살아온 어느 부부가 있다. 이번엔 그 부부의 자녀가 공동 창립자로 있는 지역 스튜디오 Roberts Gray Architects에 집을 맡겼다. 건축가는 부모님을 위한 이 집에 SKI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스키 리조트를 향한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자식 유산을 미리 써버린다(spending kids’ inheritance)”는 뜻의 말장난이기도 하다.
집은 길에서 보면 무뚝뚝하다. 시멘트블록 벽이 표정 없이 서 있고 창문 하나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집이 펼쳐진다. 건축가들은 이 집을 “도심 속 은신처(urban sanctuary)”라 부르는데, 중정과 산을 향해 활짝 열리는 구성이 그 표현을 정당화한다.

표정을 감춘 스트리트 파사드
도로에 면한 입면은 육중한 콘크리트블록 벽과 그 위에 얹힌 스틸·챠드우드(charred timber) 스크린으로만 이뤄져 있다. 이 스크린은 차고와 현관문까지 함께 가려, 지나가는 사람은 이 집이 어디로 들어가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건축가들의 설명을 빌리면, 이 집은 몇 개의 단단한 기하학적 덩어리를 신중하게 배치해 개방감과 폐쇄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설계됐다. 저녁 노을이 원아카 뒤편 산줄기를 붉게 물들일 때, 이 무표정한 파사드는 오히려 그 풍경을 한 번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산을 향해서만 열리는 문
검게 그을린 목재와 스틸로 짠 스크린은 벽을 대신해 마당 전체를 감싸며 이어지다가, 뒤뜰에서 비로소 열린다. 진입로에 놓인 대문 역시 같은 소재로 짜여 있어 벽과 하나처럼 보이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집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 문 너머로 저녁 하늘과 산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각도까지 계산됐다. 결국 이 집은 길을 향해서는 입을 다물고, 산을 향해서만 입을 여는 셈이다.

녹슨 스틸과 그을린 삼나무의 궁합
건축가들은 소재를 고를 때 서로 낡아가는 방식까지 계산에 넣었다고 말한다. 아연도금 스틸은 콘크리트블록과 색과 질감이 비슷하게 삭아가도록 짝지었고, 표면에 녹이 슬기 쉬운 흑스틸(blackened steel)은 그을린 삼나무와 나란히 두어 어울리게 했다. 일본산 삼나무와 미국산 오크는 침엽수와 활엽수로 종이 다르지만 나뭇결이 비슷해 한 공간에 함께 쓰였다. 사소해 보이는 조합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재료들이 따로 늙지 않고 함께 낡아가도록 설계한 셈이다.

안뜰과 맞닿은 리빙·다이닝
거실 한복판에는 안팎을 가르는 이중 스킨이 있다. 안쪽엔 슬라이딩 유리문을, 바깥쪽엔 슬라이딩 챠드우드 스크린을 겹으로 두고, 그 사이에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베란다를 끼워 넣었다.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주방과 거실, 그리고 마당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진다. 슬라이딩 스크린 덕분에 날씨나 프라이버시에 따라 이 경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돌바닥 위에 놓인 거실
노출 콘크리트블록 벽과 대비를 이루는 건 발밑의 돌바닥이다. 거실 바닥 전체에 스톤 페이빙을 깔아 차분한 질감을 더했고, 주방에는 붙박이 수납장을 짜 넣어 군더더기를 없앴다. 커다란 종이 펜던트 조명 하나가 이 무게감 있는 재료들 사이에서 은은한 대비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거칠고 단단한 재료들 사이에 부드러운 빛과 색을 슬쩍 끼워 넣은 셈이다.

집 안으로 들인 중정
중정을 둘러싼 슬라이딩 유리 스크린을 모두 열면 복도가 그대로 마당과 이어진다. 이 복도는 1층의 침실 두 개와 연결되는데, 각 침실은 저마다의 전용 중정을 따로 갖고 있다. 침실들은 공동으로 쓰는 욕실과도 연결되고, 이 욕실에는 야외 샤워 공간까지 딸려 있다. 방 안에서든 복도에서든,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식물과 돌이 놓인 작은 정원이 시야에 들어오게 한 구성이다.

산이 보이는 자리에 놓인 책상
2층은 규모가 크지 않다. 침실 하나가 콘크리트블록으로 쌓아 올린 높은 매스 안에 들어차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방의 책상만큼은 원아카 호수와 부캐넌 피크스(Buchanan Peaks)까지 한눈에 담기도록 창가에 바짝 붙여 놓았다. 낮은 층고의 아늑함과 탁 트인 전망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느껴지도록 배려한 자리다. 부모님이 노후를 보낼 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상 하나에 담긴 배려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삼나무로 마감한 진입홀과 계단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바깥의 거친 콘크리트블록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삼나무 판재로 마감한 진입홀은 따뜻한 톤의 조명 아래 은은하게 빛나고, 그 옆으로 짙은 색 목재 계단이 2층으로 이어진다. 현관 앞에는 가죽을 덧댄 벤치를 짜 넣어 신발을 신고 벗는 동선까지 배려했다. 밖에서 보던 무뚝뚝한 얼굴과는 달리,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이 집은 꽤 다정한 태도로 손님을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