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모듈러 주택 White Modular House는 산비탈을 한 삽도 깎아내지 않은 집에 가깝다. 코르도바주(Córdoba) 산자락, 토종 관목이 빽빽하게 덮은 급경사 대지 위에 화이트 철골 상자를 가느다란 기둥으로 받쳐 올려놓았다.
비탈에 집을 지을 때 흔한 답은 땅을 계단처럼 잘라내고 옹벽을 세우는 것이다. 설계를 맡은 아르헨티나 스튜디오 SET Arquitectura는 반대로 갔다. 땅은 그대로 두고 집이 그 위에 살짝 걸터앉게 한 것이다. 3개 층, 연면적 280m². 주말에만 오는 별장이 아니라 가족이 실제로 사는 집인데, 수영장까지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

땅을 깎지 않는 경사지 주택의 방식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구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위쪽 도로에서 철제 다리가 뻗어 나오고, 다리 끝에 정사각형 상자가 걸려 있으며, 상자 한쪽 모서리는 테라스와 수영장으로 파여 있다. 상자 밑은 숲이다. 건물이 땅에 닿는 곳은 기둥 몇 개뿐이다.
설계팀은 이 집의 전략을 “자연 지형에 최대한 적게 개입하고, 풍경이 진짜 주인공으로 남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둥으로 띄우면 흙을 퍼내고 다지는 토공사가 크게 줄고, 건물이 차지하는 땅도 작아진다. 덤으로 시선이 한 층 높아져 골짜기가 더 멀리 보인다. 설계팀 표현을 빌리면 집이 “땅 위에 가볍게 내려앉아, 거의 떠 있는” 상태다.
다만 ‘땅을 안 건드린다’는 말을 공사비가 싸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토공사와 옹벽을 아끼는 대신 그 돈은 철골과 기둥 기초, 바람에 버티는 가새로 옮겨 간다. 비탈에 집을 띄우는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앞서 소개한 〈가지처럼 뻗은 기둥 위에 띄운 경사지 주택, Lua House〉와 〈숲에 맞서 1.4m 띄운 가루이자와 별장, Shell〉도 같은 고민에서 출발했다. 차이는 이 집이 띄운 덩어리에 수영장이라는 가장 무거운 짐까지 얹었다는 점이다.

숲속에 놓인 화이트 오브제
왜 하필 화이트였을까? 주변은 짙은 그린의 관목과 거친 바위 비탈이다. 설계팀은 외장 전체를 화이트로 통일해 집을 풍경 속의 “추상적인 오브제”처럼 보이게 했다고 말한다. 숲에 섞여 들어가 숨는 대신 일부러 대비를 만든 셈이다.
외피는 철골 프레임에 골강판을 둘렀다. 창고나 공장에서 흔히 보는 그 물결 모양 금속판이다. 값이 싸고 가볍고 빨리 붙는다. 모듈을 반복해 짓는 이 집의 논리와 잘 맞는 재료랄까. 물결 골이 만드는 가는 세로 그림자 덕분에 화이트 면이 밋밋한 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설계팀은 이 대비가 자연을 누르려는 게 아니라 “자연의 유기적인 복잡함과 건축의 합리적인 기하학, 서로 다른 두 조건이 공존한다는 걸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말은 아름답지만 유지관리는 현실이다. 흙먼지 날리는 산비탈에서 화이트 금속 외피는 금방 얼룩이 앉고, 강판 이음부와 철골에는 주기적인 녹 관리와 재도장이 따라붙는다. 이 집의 화이트는 한 번 칠하고 끝나는 색이 아니라 계속 관리해야 하는 색이다.

모듈러 주택이라는 이름의 진짜 뜻
한국에서 ‘모듈러 주택’이라고 하면 보통 공장에서 상자를 만들어 트럭으로 실어 와 크레인으로 쌓는 집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집에서 말하는 모듈은 조금 결이 다르다. 설계팀은 평면 구성, 구조 시스템, 파사드, 동선까지 집 전체를 하나의 모듈 체계로 짰다고 설명한다. 공장 제작 여부보다는 같은 치수의 격자로 집 전체를 정리하는 설계 방식에 가깝다(공장 사전제작을 썼는지는 공개된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정면에서 보면 그 격자가 그대로 읽힌다. 정사각형 평면을 세 켜로 쌓았고, 창과 강판 면과 발코니가 같은 칸 안에서 자리만 바꿔 가며 반복된다. 아래로는 블랙 철골 기둥 사이에 X자 가새가 걸려 있다. 몸통은 화이트, 다리는 블랙으로 나눠 칠한 덕에 상자가 공중에 떠 있다는 인상이 한층 강해진다.
격자로 설계하면 부재 종류가 줄고 도면이 단순해져 시공이 빨라진다. 이 집이 ‘효율과 명료함’을 얻었다고 설계팀이 말하는 이유다. 대신 모든 방의 크기와 창 위치가 격자에 묶인다는 제약도 함께 따라온다. 방마다 원하는 대로 창을 내고 싶은 건축주라면 답답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다.

다리를 건너 가운데 층으로 들어간다
이 집의 현관은 1층이 아니라 가운데 층에 있다. 위쪽 도로에서 철제 다리를 건너 곧장 가운데 층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배치도를 보면 다리가 시작되는 도로 쪽, 지붕 덮인 플랫폼 아래가 주차 자리다. 경사지에서 진입로 높이를 맞추려고 땅을 깎는 대신 다리 하나로 높이 차를 건너뛴 셈이다.
설계팀은 진입 순서에 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다리를 걷는 동안 골짜기 풍경이 한 번에 쏟아지지 않고 조금씩 드러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로 살을 촘촘히 세운 화이트 난간 사이로 발아래 숲이 내려다보이니,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공중에 떠 있다’는 감각을 몸으로 먼저 겪게 된다.
매일 쓰는 동선으로 보면 장단이 분명하다.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릴 필요 없이 주차한 자리에서 수평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산비탈 집으로서 대단한 편의다. 반면 비바람이 부는 날 지붕 없는 다리 구간은 꽤 긴 야외 복도가 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손님이라면 첫 방문이 조금 긴장될 수도 있다.

집 한가운데를 비운 계단 보이드
현관이 있는 가운데 층이 거실, 주방, 다이닝을 담은 공용 공간이다. 공간의 한복판은 계단이 차지한다. 화이트 철봉을 촘촘히 세운 수직 케이지 안에 목재 디딤판을 띄워 놓았고, 그 위로 천창이 뚫려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이 계단 사이를 지나 세 개 층을 차례로 적신다.
계단을 벽 속에 숨기지 않고 집 가운데 둔 선택은 생활 방식까지 바꾼다. 위층 침실에서 나는 소리,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빛이 이 보이드를 타고 오가니 가족은 서로 다른 층에 있어도 기척을 느낀다. 커다란 단독주택에서 흔히 생기는 ‘각자 방에 박혀 얼굴 볼 일이 없는’ 문제를 구조로 덜어내는 방식이다.
공짜는 아니다. 트인 보이드는 소리를 막지 못하고, 더운 공기는 꼭대기로 몰린다. 철봉 난간은 시원해 보이지만 어린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간격부터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사방의 큰 유리창은 거실과 다이닝을 바깥 테라스와 하나로 이어 주고, 덕분에 낮에는 실내에 있어도 반쯤 야외에 있는 듯한 밝기가 유지된다.

두 개 층 높이 거실, 클래식 암체어와 철골 상자
거실 한쪽은 천장이 두 개 층 높이로 트였고,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통창이 올라간다. 그 아래 놓인 가구가 흥미롭다. 조각 장식이 들어간 크림색 클래식 암체어, 다리를 깎아 만든 다이닝 테이블. 골강판과 철봉으로 지은 인더스트리얼한 상자 안에 꽤 고전적인 가구를 들여놓았다.
이질적인 조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차가운 금속 건축에 손맛 있는 가구를 넣으면 공간에 온기가 돈다. 다만 섞을 때는 주인공을 정해야 한다. 이 거실은 의자 여러 개가 같은 톤으로 반복되면서 장식적인 가구가 무리를 이루는데, 그러다 보니 창밖 풍경과 시선을 다투는 순간이 생긴다. 높은 벽 위에 그대로 드러난 벽걸이 에어컨도 화이트 벽 위에서 의외로 눈에 띈다.
비슷한 집을 꾸민다면 클래식 가구는 한두 점만 ‘시선을 끄는 가구’로 남기고 나머지는 낮고 단순한 형태로 받쳐 주는 편이 좋다. 원목 마루와 화이트 벽뿐인 바닥에는 큰 러그를 깔아 앉는 영역을 묶어 주면 높은 천장 아래서도 공간이 붕 뜨지 않는다. 에어컨은 시스템 매립형이나 덕트형으로 처음부터 계획에 넣어야 화이트 상자의 깔끔함이 유지된다.

비탈 위로 내민 공중 수영장
이 집에서 가장 대담한 장면은 가운데 층의 수영장이다. 설계팀은 이것을 “비탈 위로 내민, 매달린 볼륨”이라고 부른다. 거실 유리문을 열면 데크가 이어지고, 데크 끝에서 물이 시작된다. 물 너머는 난간 대신 유리판이라 수면과 골짜기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보인다.
수영장 위로는 화이트 철골 프레임이 테두리를 그린다. 지붕은 없지만 집의 격자가 바깥까지 연장돼, 수영장이 덧붙인 시설이 아니라 집의 한 칸처럼 읽히게 만든다. 테라스, 플랫폼, 수영장이 차례로 이어지며 산의 기후를 즐기고 풍경을 바라보는 야외 동선을 이룬다.
구조적으로는 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다. 물은 1m³에 1톤이다. 작은 풀이라도 몇 톤에서 수십 톤의 하중이 기둥 위 철골에 실리는 셈이고, 방수가 한 번 새면 바로 아래층과 철골이 피해를 본다. 이 집의 구조 엔지니어링은 Lucas Crespi가 맡았다. 비슷한 집을 꿈꾼다면 수영장 크기보다 먼저 방수 상세와 누수 점검 동선을 설계 단계에서 확인해야 한다.

침실마다 다른 거리로 만나는 풍경
침실은 공용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맨 아래층과 맨 위층에 나뉘어 있다. 마스터 침실은 꼭대기 층이다. 설계팀은 방마다 풍경과 맺는 관계가 다르도록 했다고 말한다. 보이는 방향, 사생활의 정도, 바깥과 연결되는 방식이 방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뜻이다.
꼭대기 층 마스터 침실은 의외로 닫혀 있지 않다. 침대 바로 옆까지 계단 보이드가 올라와 철제 난간으로만 경계가 나뉘고, 그 너머로 아래층 수영장의 물빛이 보인다. 커튼은 시어 커튼과 리넨 커튼을 겹쳐 달았다. 낮에는 집 전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개방감이 있다.
문제는 밤이다. 사람은 등 뒤가 막혀 있어야 깊이 잠든다. 아래층 불빛과 소리가 그대로 올라오는 침실은 가족이 다른 시간대에 생활하기 시작하면 금세 불편해진다. 이런 구성이라면 보이드 쪽에 미닫이 칸막이나 바닥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커튼 레일 하나를 미리 넣어 두는 것이 현실적인 보험이다.

밤의 유리 상자, 조명은 거의 숨어 있다
다른 침실 하나는 숲 쪽으로 통창을 냈다. 천장에는 라탄처럼 엮은 큼직한 펜던트가 하나 매달려 있다. 이 집의 조명은 대체로 이렇게 단출하다. 다이닝 위 천장에는 블랙 레일 스포트 조명이 몇 개 걸렸고, 침실과 욕실에는 사각형 직부등이 하나씩 붙어 있다. 간접 조명이나 벽 조명은 사진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게 낮의 자연광을 중심에 두고 설계한 집이다.
낮에는 그걸로 충분하다. 문제는 해가 진 뒤다. 사방이 유리인 집에서 밤에 천장등 하나만 켜면 창은 바깥을 보여 주는 대신 실내를 비추는 블랙 거울이 된다. 게다가 화이트 벽과 천장은 빛을 잘 반사해서, 머리 위 직부등 하나가 방 전체를 균일하고 밋밋하게 밝힌다. 조명은 전반, 국부, 연출의 세 겹이 겹쳐야 공간에 깊이가 생기는데, 이 집은 첫 번째 겹 하나로 밤을 버티는 구성이다.
처방은 어렵지 않다. 침실과 거실의 등은 2700~3000K 웜톤 전구로 바꾸고 디머를 단다. 커튼박스 안에 라인 조명을 숨겨 커튼을 위에서 쓸어내리듯 비추면 유리창의 거울 효과가 크게 줄어든다. 침대 옆과 소파 옆에는 낮은 위치의 스탠드를 하나씩 둔다. 바깥 데크와 수영장에 눈높이보다 낮은 조명을 깔아 두면, 밤에도 창밖에 무언가 보여서 유리 상자가 덜 갇힌 느낌이 든다.

욕실까지 숲을 향해 열었다
욕실도 예외 없이 풍경 쪽이다. 클로풋 욕조가 창 앞에 놓였고, 블랙 상판 위에 볼 형태 세면기 두 개가 나란히 앉았다. 한쪽 벽 전체를 덮은 거울이 창밖 숲을 한 번 더 비춰 욕실이 실제보다 넓어 보인다.
눈여겨볼 디테일은 창의 아래 칸이다. 욕조 높이까지는 반투명 유리를 넣고 그 위로만 투명 유리를 썼다. 욕조에 앉으면 숲과 하늘이 보이고, 바깥에서는 몸이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열린 집에서 욕실 사생활을 지키는 가장 단순하고 값싼 장치랄까.
아쉬운 건 조명이다. 천장 한가운데 붙은 사각 직부등 하나가 욕실 전체를 맡는데, 이러면 거울 앞에 선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세면대 거울 양옆이나 위에 세로형 조명을 더하면 화장이나 면도가 훨씬 편해진다. 욕조 쪽은 반대로 낮고 따뜻한 빛 하나면 충분하다.

띄운 집이 감당해야 할 것들
모서리에서 보면 이 집의 성격이 다시 분명해진다. 세 켜의 상자는 한쪽이 강판 면으로 닫히고 다른 쪽은 유리와 테라스로 열린다. 열린 쪽은 모두 골짜기를 향한다. 설계팀이 평면을 짤 때 지형과 조망을 가장 먼저 따졌다는 말이 그대로 형태로 드러난다.
다만 기둥 위에 올린 유리 상자가 산에서 감당해야 할 것도 분명하다. 큰 유리면은 여름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다. 거실 벽의 에어컨은 그 대가로 읽힌다. 코르도바 산지는 건조기마다 산불이 반복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바닥 밑까지 관목이 차오르는 띄운 집이라면 집 주변 식생을 일정 거리 정리하는 방화 관리 계획이 필요하다. 바닥 아래로 바람이 그대로 지나가니 바닥 단열도 일반 주택보다 신경 써야 한다(이 집의 단열 사양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집이 남기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경사지를 평지처럼 만들어 집을 앉히는 대신, 집이 경사지에 맞춰 몸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280m²짜리 주거가 들어섰는데도 집 아래 땅은 여전히 관목과 바위의 비탈로 남았다. 땅을 많이 바꾸지 않는 집이 결국 그 땅의 풍경을 가장 오래 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