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글에 나오는 공간은 Lisa Kudrow(리사 쿠드로)가 사는 집이 아니다. 그가 시트콤 프렌즈(Friends)의 Phoebe(피비)로 10년을 보낸 촬영 스튜디오, 즉 프렌즈 세트장이 있던 캘리포니아 버뱅크(Burbank)의 Warner Bros. 스튜디오 부지다. 로스앤젤레스 산불 이후 이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각자 아끼는 장소를 소개하는 영상 시리즈에서, Kudrow는 자기 집 대신 이 스튜디오를 골랐다.
그가 카트를 몰고 돈 곳은 프렌즈를 찍은 사운드스테이지와 오프닝 타이틀의 분수, Phoebe 아버지의 집으로 나왔던 백롯 주택, 그리고 장미 정원이다. 모두 촬영을 위해 지은 가짜 건물이거나 그 가짜를 품은 거대한 상자들이다. 그런데 이 가짜들 안에는 사람이 어떻게 마주치고, 어디를 보고 앉고, 어떤 색에 기억이 붙는지에 대한 꽤 정확한 답이 들어 있다. 세트가 집보다 솔직한 이유는, 처음부터 사람의 행동을 의도하고 지었기 때문이다.

프렌즈 세트장의 진짜 주소, 1935년에 지은 Stage 24
프렌즈의 시작은 지금 서 있는 이 건물이 아니었다. 파일럿은 Warner Bros. Ranch라는 별도 부지에서 찍었고, 정규 편성이 확정된 첫 시즌은 Stage 5라는 작은 사운드스테이지에서 촬영했다. 바로 옆이 의학 드라마 ER의 촬영장이라 두 출연진이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첫 시즌이 성공하자 제작진은 방청객을 더 받을 수 있는 큰 스테이지로 옮겼다. Kudrow는 400명이었나, 200명이었나 하고 웃으며 숫자를 얼버무렸지만, 그 건물이 Stage 24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외벽 명판에 따르면 1935년에 지은 건물이다.
창 하나 없는 베이지 상자다. 외벽에 붙은 The Friends Stage 명판도 그들이 떠난 뒤에 생겼다. Kudrow는 어느 순간부터 점심을 먹으러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스튜디오 투어 인파가 몰리니 스테이지 안에 머무는 편이 편했다는 것이다. 바깥 빛이 한 줄도 들지 않는 상자가 10년 가까이 한 무리 배우들의 생활공간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 The Comeback의 마지막 시즌을 바로 이 Stage 24에서 다시 찍었다. 프렌즈와 The Comeback, 두 작품을 같은 상자 안에서 끝낸 것이다.
사운드스테이지가 창을 버린 이유는 빛을 100% 통제하기 위해서다. 해가 움직여도 장면의 밝기가 변하지 않아야 하니까. 집은 반대다. 창 없는 방은 드레스룸이나 팬트리처럼 잠깐 들르는 공간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오래 머무는 방이 그렇다면 시간 감각부터 흐려진다. 아파트에서 알파룸이나 북향 작은 방을 서재나 작업실로 쓰고 있다면, 낮에는 문을 열어 거실 빛을 끌어오고 책상은 창이나 문 쪽을 향하게 두는 것만으로도 상자에 갇힌 느낌은 크게 줄어든다.

문은 전부 거실로 열린다, 시트콤이 설계한 동선
세트를 걷어낸 사운드스테이지는 그냥 거대한 창고다. 천장에는 조명을 매다는 철골 그리드가 깔려 있고, 벽 한쪽으로 철제 계단이 오른다. 프렌즈의 아파트와 Central Perk는 모두 이런 빈 바닥 위에 지어졌다가 철거됐다. 세트는 작품이 끝난 뒤 하나하나 목록을 붙여 창고로 갔고, 커피하우스는 지금 Warner Bros. 스튜디오 투어 안에 다시 지어져 있다.
이 빈 바닥 위에 프로덕션 디자이너 John Shaffner와 Joe Stewart가 그린 평면에는 분명한 규칙이 하나 있었다. 침실 문이 전부 거실로 바로 열린다는 것. 화면 밖 복도로 빠지는 문은 없다. 욕실 문은 침실 문 맞은편에 뒀다. 누가 씻으러 가든 거실을 가로질러야 한다. Shaffner는 이를 연극 무대의 소극(farce) 구조라고 설명했다. 문이 많이 열리고 닫힐수록 사람이 마주치고, 마주칠수록 이야기가 생긴다. Stage 24로 옮긴 두 번째 시즌부터는 Central Perk 창밖에 실제 거리를 지을 여유도 생겼다. 첫 시즌에는 공간이 좁아 Warner Bros.가 보관하던 오래된 그림 배경막 두 장을 창밖에 세우고, 아래쪽 유리를 반투명하게 처리한 뒤 화분을 걸어 어색함을 가렸다.
이 동선은 실제 집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방문이 거실로 바로 열리는 집에서는 가족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를 마주치고, 그 잦은 마주침이 대화량을 늘린다. 대신 프라이버시는 얇아진다.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거나 재택근무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은 구조가 피로가 된다. 마주침을 원한다면 거실 중심형 평면을 그대로 살리고, 쉼이 필요하다면 방 앞에 짧은 전실이나 수납장 벽을 세워 문과 거실 사이에 한 겹의 완충을 만드는 것이 방법이다. 공간이 관계를 만드는 방식은 생각보다 직접적이다.

네 번째 벽이 없는 거실, 소파는 객석을 본다
스테이지 한쪽에는 계단식 객석이 남아 있다. 프렌즈는 방청객 앞에서 녹화한 시트콤이었다. 그래서 세트는 연극 무대처럼 객석 쪽 벽 하나가 통째로 없다. 거실도, 커피하우스도 늘 한쪽 면이 열려 있고, 그 열린 쪽으로 카메라와 관객이 앉는다. Central Perk의 소파가 언제나 화면을 정면으로 향해 놓여 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한국 아파트 거실이 바로 이 구조를 닮았다. 소파는 한 벽에 붙고 맞은편 벽에는 TV가 걸린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보는 객석형 배치다. 무엇을 함께 보기에는 좋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기에는 불리하다. 시트콤 속 인물들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도 대화가 되는 건 대본이 있기 때문이고, 실제 거실에서는 고개를 돌려야 하는 자리에서 대화가 오래가지 않는다.
소파를 바꿀 필요까지는 없다. 1인 라운지 체어 하나를 소파와 직각으로 두거나 마주 보게 놓으면 객석이 원탁이 된다. 거실이 좁다면 소파를 ㄱ자형 모듈로 바꾸는 방법도 있다. 세트가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공간으로 번역하는지는 앞서 소개한 〈집이 아니라 세트다, Margot Robbie의 폭풍의 언덕 저택〉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퍼플 벽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라이트 그레이?
Monica의 아파트가 퍼플이 된 데는 설계자의 고집이 있었다. Shaffner는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화이트 모형을 앞에 두고 프로듀서들이 색을 어떻게 할지 묻자 벽을 퍼플로 칠하자고 했다. 팀 전체가 불안해했지만 퍼플을 입힌 모형을 보고 나서야 다들 수긍했다고 한다. 그는 색이 쇼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결정적이라고 봤다. 그 판단은 맞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라벤더 퍼플 벽 한 장면만으로 어떤 드라마인지 맞힐 수 있으니까.
반전도 있다. 화면 속 원목 바닥은 사실 나뭇결을 인쇄한 리놀륨이었다. 한 에피소드를 위해 주말 사이 일부를 진짜 쪽모이 원목으로 갈아 끼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Shaffner는 지금 이 세트를 다시 짓는다면 벽을 라이트 그레이로 칠할 거라고 했다. 요즘 쉽게 살 수 있는 저렴한 가구를 섞고, 테이블과 의자도 더 깔끔한 것으로 바꿀 거라고.
솔직히 그 버전은 덜 매력적이다. 라이트 그레이는 실패가 없는 색이지만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퍼플 벽이 통했던 건 웜톤 원목 가구, 레드 계열 소품, 잡다한 빈티지 조명과 함께 섞였기 때문이다. 강한 벽색은 주변을 따뜻한 재료로 받쳐줄 때 비로소 집이 된다. 짙은 색일수록 빛을 먹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퍼플이나 네이비 같은 벽을 거실에 들인다면 한 면만 칠하고, 2700~3000K 웜톤 전구와 벽을 비추는 플로어 스탠드를 함께 두는 것이 안전하다. 전세나 월세라면 붙였다 떼는 페인트 시트로 먼저 시험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오프닝의 분수, 세 시간 동안 젖어 있던 프렌즈
스튜디오 부지 안에는 프렌즈 오프닝 타이틀에 나오는 그 분수가 있다. 옆에는 팬들의 사진 명소가 된 레드 소파가 놓였다. Kudrow의 기억 속 오프닝 촬영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한 회 녹화를 마친 늦은 밤, 금방 끝난다는 말을 믿고 나섰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물에 젖고 추운 채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춤을 춰야 했다. 화면 속 여섯 명이 웃고 있는 장면은 대부분 Matthew Perry(매튜 페리)가 한 번만 더 가자는 스태프에게 농담을 던진 직후라고 한다.
이 분수는 프렌즈보다 먼저 데뷔했다. 1993년 영화 Hocus Pocus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뉴욕도 되고 매사추세츠의 작은 도시도 되는 셈이다. 원래 Warner Bros. Ranch에 있던 이 분수는 프렌즈 방영 25주년을 맞은 2019년, Warner Bros.가 보존을 위해 메인 부지로 옮기기로 하면서 지금 자리에 왔다. 장식이 많지 않은 고전풍 원형 분수라서 가능한 일이다. 특정 지역색이 짙었다면 이렇게 여러 작품을 오가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서도 같은 원리가 통한다. 오래 쓸 큰 물건일수록 특정 유행이나 스타일을 강하게 띠지 않는 쪽이 유리하다. 다이닝 테이블, 소파 프레임, 붙박이장처럼 바꾸기 어려운 것은 단순한 형태와 중립적인 재료로 고르고, 계절이나 취향에 따라 바뀌는 쿠션, 러그, 조명갓에서 개성을 내는 것이다. 분수는 그대로인데 배경이 바뀔 때마다 다른 도시가 되는 것처럼.

Phoebe 아버지의 집은 백롯에 있다, 현관 포치의 쓸모
스튜디오 뒤편 백롯에는 진짜처럼 지은 거리가 펼쳐진다. 뉴욕풍 벽돌 거리, 가제보가 있는 소도시 광장, 교회와 빅토리안 주택이 블록마다 바뀐다. Kudrow는 한 벽돌 주택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 포치에서 찍은 것 같다고 했다. 영상 제작진이 알려준 정체는 시즌2 The One with the Bullies에서 Phoebe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의 집이었다. 그는 이 거리의 건물들은 하나하나가 다 지어져 있어서 무엇이든 찍을 수 있다며 감탄했다.
이 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현관이다. 벽돌 기둥 두 개가 박공지붕을 받친 작은 포치가 계단 위에 붙어 있다. 길에서 바로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붕 아래 한 칸을 거친다. 영화에서는 인물이 초인종을 누르고 망설이는 장면을 담는 무대가 되고, 실제 집에서는 비를 피하고 우산을 털고 택배를 놓는 자리가 된다.
한국 단독주택은 이 전이 공간을 아끼는 경우가 많다. 대문을 열면 바로 현관문이다. 깊이 1.2m 정도의 캐노피만 내도 비 오는 날 현관 바닥이 덜 젖고, 그 아래 작은 벤치 하나를 두면 신발을 갈아 신거나 이웃과 잠깐 서서 이야기하는 자리가 생긴다. 아파트라면 현관 중문 바깥 한 칸을 벤치와 수납으로 채우는 것이 같은 역할을 한다.

가구만 들이면 집이다, 웨인스코팅과 붙박이 선반의 힘
벽돌 주택 세트 안으로 들어가면 실제 집처럼 방이 나온다. 하부 벽은 짙은 목재 웨인스코팅으로 둘렀고, 상부 벽은 옅은 민트 톤이다. 창 옆과 벽 사이사이에는 붙박이 선반이 짜여 있고 천장에는 목재 보가 지난다. Kudrow는 바닥은 가짜 나무겠지만 이건 집이라며, 가구만 들이면 된다고 했다.
이 말이 핵심이다. 가구 하나 없는 빈방이 이미 집처럼 보이는 건 벽에 붙은 목공 디테일 덕분이다. 웨인스코팅, 몰딩, 붙박이 선반은 공간의 비례를 잡고 시대감을 입힌다. 소파가 없어도 이 방이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의 집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반대로 요즘 아파트가 이사 직후 텅 비었을 때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건, 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짙은 목재가 벽의 절반 가까이를 덮고 창은 작아서 방이 전체적으로 어둡다. 따라 한다면 웨인스코팅은 바닥에서 900~1,000mm 높이까지만, 색은 상부 벽보다 한두 톤 진한 정도로 조절하는 편이 아파트 층고에 맞는다. 선반은 창 양옆이나 TV 벽에 붙박이로 짜면 수납과 장식을 한 번에 해결한다. 웨인스코팅의 종류와 비례는 〈집의 가치를 올리는 웨인스코팅(Wainscoting) 기법 인테리어, 의미와 활용〉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시트콤의 빛은 그리드에서 온다, 집 조명은 세 겹으로
Kudrow가 인터뷰를 한 자리는 낡은 목재 판벽이 그대로 드러난 스테이지 안쪽이다. 그 옆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스탠드 위에 커다란 구형 발룬 조명이 떠 있다. 빛을 사방으로 부드럽게 퍼뜨려 그림자를 지우는 장치다. 앞서 본 빈 스테이지 천장의 그리드에는 수십 개의 조명이 걸린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찍는 시트콤은 어느 각도에서 잡아도 얼굴이 고르게 밝아야 해서, 세트 전체를 위에서 균일하게 비추는 하이키 조명이 기본이다.
문제는 이 방식을 집에 그대로 들이면 시트콤처럼 납작해진다는 것이다. 천장 매입등만 줄줄이 켜 둔 거실이 그렇다. 그림자가 없으니 깊이도 없다. 조명은 공간 전체를 밝히는 전반 조명, 책상과 조리대처럼 일하는 자리를 비추는 작업 조명, 벽이나 그림에 포인트를 주는 연출 조명을 세 겹으로 겹쳐야 공간이 입체적으로 읽힌다.
발룬 조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큰 종이 랜턴 펜던트나 오팔 유리 구형 램프 하나를 거실 한가운데 낮게 달면 천장 매입등보다 훨씬 부드러운 전반 조명이 된다. 여기에 소파 옆 플로어 스탠드와 선반 안쪽 라인 조명을 더하고, 색온도는 2700~3000K 웜톤으로 맞춘다. 디머 스위치를 하나 달면 저녁 시간의 거실은 세트가 아니라 집이 된다.

장미 정원은 그대로 두라, 바꾸지 않는 것도 설계다
부지 곳곳에는 장미 정원이 있다. Kudrow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은 풍경이다. 1928년부터 영화를 찍어 온 이 스튜디오에는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Kudrow는 The Comeback 공동 제작자 Michael Patrick King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지금은 사무실로 쓰지만 원래는 뉴욕에서 날아온 배우들이 촬영 기간 동안 묵던 아파트였던 곳이 부지 안에 있다고 전했다. 지각하면 걸어가서 침대에서 끌어내면 되니 배우를 꽤나 단단히 붙잡아 두는 구조였겠다며 그는 웃었다.
영상 끝에서 Kudrow는 진지해진다. 스튜디오의 주인이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오가던 때였다. 소유권은 늘 바뀌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이 부지가 지금 모습 그대로 보존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곳은 잘 작동하고, 자신들이 막 여기서 촬영을 마쳤으며, 누가 사든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마지막 부탁은 이랬다. 제발 Jack Warner의 장미만은 뽑지 말아 달라.
집을 고칠 때도 이 말은 유효하다. 리모델링을 시작하면 뭐든 다 뜯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손때 묻은 붙박이장, 잘 작동하는 창 하나는 새로 사 올 수 없는 것들이다. 무엇을 바꿀지 정하기 전에 무엇을 남길지부터 목록으로 적어 보면 좋다. 남긴 것들이 새로 들인 것들 사이에서 그 집만의 기억을 붙잡아 준다. 프렌즈의 세트는 창고로 갔지만, 분수와 장미와 Stage 24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