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 술집이 스플릿 플로어 주택으로, Miel & Eline House

벨기에 헨트(Ghent)의 한 골목, 30년 전만 해도 이 도시에서 가장 험한 동네로 꼽히던 곳에 반 층씩 어긋나며 올라가는 스플릿 플로어 주택이 한 채 서 있다. 원래 이 자리는 살림집과 술집, 그리고 소를 묶어 두던 축사가 한 덩어리로 붙은 이른바 ‘도축장 카페’였다.

이 건물을 사들인 Miel과 Eline 부부는 헨트의 Atelier Vens Vanbelle에 설계를 맡겼다. 건축가들은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지만 과거를 통째로 지우지는 않았다. 축사 지붕을 받치던 오크 보는 새 집의 뼈대로 다시 짜 넣었고, 술집 카운터의 기억은 주방에, 어둡던 축사는 빛이 쏟아지는 작업장으로 남겼다. 신축인데도 오래 산 집 같은 인상은 거기서 나온다.

옛 도축장 카페 자리에 새로 지은 헨트 주택 거리 쪽 외관
© Tim Van de Velde

가축시장 전날 밤, 소가 묵어 가던 술집

헨트에는 매주 목요일 새벽 5시에 가축시장이 섰다. 그래서 수요일 저녁이면 헨트 외곽 마을에서 온 농부 몇 명이 이 집 앞에 소를 내려 집 뒤 축사로 몰아넣었다. 소를 들여놓고 나면 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거리 쪽 카페에 앉아 전 주인 Irene이 따라 주는 맥주를 마시는 것.

당시 이 동네에는 이런 가게가 스무 곳 남짓 있었다. 가축시장과 도축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들르던 술집이라 ‘도축장 카페(slaughterhouse café)’라고 불렸다. 지금 이 일대는 일부러 찾아와 사는 인기 주거지가 됐고, 소 울음소리와 술집 간판은 동네 사람들 기억 속에 흐릿하게만 남아 있다. Miel과 Eline이 산 건 결국 집 한 채가 아니라 그 시절이 통째로 남은 필지였던 셈이다.

패턴 유리로 마감한 Miel & Eline House 1층 가로 입면
© Tim Van de Velde

일부러 심심하게 만든 벨기에 주택의 앞모습

골목에서 보면 이 집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다. 옅은 그레이 톤으로 칠한 벽돌 입면에 세로로 긴 창을 규칙적으로 뚫었고, 1층은 블랙 스틸 프레임에 패턴 유리를 끼웠다. 설계팀은 앞뒤 입면을 일부러 중립적이고 절제된 얼굴로 남겼다고 설명한다. 놀라운 장면은 안쪽에 아껴 뒀다는 뜻이다.

1층의 패턴 유리는 꽤 영리한 선택이다. 빛은 들이되 길 가는 사람의 시선은 흐릿한 실루엣으로 걸러 낸다. 거리와 바로 맞닿은 옛 술집 자리에 살림을 들이면서 사생활을 지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고, 이 유리는 현관 복도와 욕실까지 집 안 곳곳에서 반복된다. 같은 헨트에서도 유리벽돌로 빛을 끌어들인 Glass Brick House가 파사드 전체로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이 집은 정반대로 골목 풍경 속에 몸을 숨기는 쪽을 골랐다.

정원 너머로 투명 골판 지붕을 얹은 옛 축사가 보이는 헨트 주택 뒤뜰
© Tim Van de Velde

고쳐 쓸까, 새로 지을까

처음 고민은 리노베이션이었다. 그런데 집 상태가 나빴고 평면도 지금 생활에 맞지 않았다. 고치려면 거의 모든 것을 뜯어내야 했기에 설계팀은 아예 새로 짓기로 했다. 대신 과제를 하나 세웠다. 옛 축사가 품고 있던 분위기를 새 집으로 이어 오고, 그 기운을 집과 정원까지 한 줄로 엮는 것이다.

대지 뒤쪽의 정원은 이 집의 숨은 자산이다.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동네 한복판, 그것도 헨트 순환도로와 가까운 자리에 이만한 크기의 조용한 뒤뜰이 남아 있다는 건 드문 일이다. 정원 끝에는 옛 축사가 그대로 서 있고, 새 집과 축사가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반 층씩 어긋난 스플릿 플로어와 오크 보가 드러난 헨트 주택 실내
© Tim Van de Velde

현관에서 아이 방까지, 반 층 8개의 스플릿 플로어

새 집의 단면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앞쪽 볼륨과 뒤쪽 볼륨을 반 층씩 어긋나게 놓고 그 사이에 계단을 세웠다. 현관에서 출발해 반 층씩 여덟 번 오르면 맨 위 아이 방 메자닌에 닿는다.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은 최대한 줄여 정원을 넓게 남기고, 앞 파사드에서 뒤 정원까지 빛이 막힘없이 관통하게 하려는 계산이다.

스플릿 플로어의 묘미는 ‘같은 층이 아닌데 같은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다. 반 층 차이는 시선은 이어 주되 영역은 갈라 준다. 거실에 있는 부모는 위쪽 작업 공간의 기척을 느끼고, 아이는 메자닌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본다. 문 하나 닫으면 끊기는 일반적인 층 구분과 달리 가족의 존재감이 늘 은근하게 흐르는 구조다. 용어의 정확한 뜻이 궁금하다면 스플릿 플로어(Split Floor)가 무엇인지 정리한 글을 함께 보면 좋다.

오크 보 아래 로즈 핑크 소파를 둔 거실과 위로 이어지는 반 층 계단
© Tim Van de Velde

새 집에 옮겨 심은 축사 지붕의 오크 보

거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걸리는 건 천장과 계단 둘레를 가로지르는 굵은 오크 보다. 설계팀은 옛 축사 지붕의 오크 보 구조를 본떠 새 집 안에 다시 짰다. 거칠고 결이 깊은 보가 매끈한 새 오크 바닥 위로 지나가니, 신축 특유의 반들반들한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다.

흥미로운 건 이 보들이 장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 층마다 바닥 레벨이 달라지는 이 집에서 보는 일종의 기준선 노릇을 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같은 보가 눈높이를 바꿔 가며 나타나니 지금 내가 집의 어디쯤에 있는지 몸이 먼저 안다. 로즈 핑크 소파 하나를 둔 것 외에는 가구도 낮고 단출하게 정리해 보가 주인공이 되게 했다.

오크 보에 둘러싸인 중앙 계단을 오르는 모습
© Tim Van de Velde

스플릿 플로어를 하나로 꿰는 중앙 계단

계단은 이 집의 척추다. 오크 보에 둘러싸인 계단을 따라 오르면 반 층마다 다른 방이 눈앞에 열리고 등 뒤로 방금 지나온 방이 내려다보인다. 설계팀은 계단을 단순한 동선이 아니라 공간을 체험하는 장치로 만들고, 그 덕에 식구들끼리 층을 건너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다만 짚어 둘 점도 있다. 반 층이 여덟 번이라는 건 하루에도 수십 번 계단을 오르내린다는 뜻이다.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에게는 놀이터 같은 집이지만,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나이가 들어 무릎이 시원찮아지면 이 리듬이 부담으로 바뀔 수 있다. 스플릿 플로어를 고민한다면 침실과 욕실처럼 매일 쓰는 공간을 몇 번째 단에 둘지 먼저 따져 보는 게 좋다.

술집 바처럼 한 단 높인 주방 작업대와 바 스툴
© Tim Van de Velde

술집 바 높이로 올린 주방

이 집에서 가장 재치 있는 대목은 주방이다. 설계팀은 주방 작업대를 바닥보다 한 단 높였다. 덕분에 반대편 스툴에 앉으면 옛 술집 카운터에 앉은 것과 같은 높이가 된다. 세로 결 목재로 감싼 아일랜드 앞에 레드와 블랙 바 스툴이 한 쌍 놓여 있고, 벽에는 ‘IRENE’이라는 이름이 적힌 카페 포스터가 걸려 있다. 이 집에서 맥주를 따르던 전 주인의 이름이다. 영락없는 동네 펍의 한 장면이다.

높이 차이는 관계를 바꾼다. 요리하는 사람은 바텐더처럼 한 단 위에서 손님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대접받는 자리에 놓인다. 손님이 오면 자연스레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다. 작업대에 서면 창 너머로 정원과 옛 축사가 내다보여, 설거지하는 시간마저 집의 내력을 바라보는 시간이 된다.

정원을 향해 통유리를 낸 다이닝 공간
© Tim Van de Velde

정원을 향해 통째로 연 다이닝

주방과 이어진 다이닝은 정원 쪽 벽을 통유리로 텄다. 타원형 테이블에 앉으면 바로 앞이 정원의 녹음이다. 바닥은 테라코타 톤으로 마감해 바깥 테라스와 색감을 맞췄고, 그 덕에 안과 밖의 경계가 한결 옅어진다.

통유리 창은 자칫 실내를 어항처럼 만들기 쉽다. 이 집은 정원 둘레를 키 큰 식물로 촘촘히 채워 그 문제를 피했다. 바깥 시선은 식물이 걸러 주고, 실내에서는 창 전체가 계절마다 바뀌는 그림이 된다. 도시 주택에서 큰 창을 낼 때 커튼보다 식재를 먼저 계획하라는 조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투명 골판 지붕 아래 빛과 그림자가 내려앉은 옛 축사 라운지
© Tim Van de Velde

투명 골판 지붕을 얹자 어둡던 축사에 빛이 쏟아졌다

정원 끝의 옛 축사는 원래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창고였다. 설계팀은 바닥 일부를 걷어 내 층고를 시원하게 트고, 낡은 지붕 마감재를 걷어 낸 자리에 투명 골판을 얹었다. 그러자 오래된 트러스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며 화이트로 칠한 벽돌 벽과 바닥 위에 줄무늬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마다 그림자의 각도가 바뀌니 이 공간은 해시계처럼 하루를 보여 준다.

조명도 눈여겨볼 만하다. 낮에는 지붕 전체가 거대한 전반 조명 노릇을 하니 따로 불을 켤 일이 없다. 해가 지면 보 사이에 매달린 필라멘트 전구 펜던트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는다. 웜톤의 맨 전구는 라운지 분위기를 내기엔 제격이지만, 한 종류의 조명만으로는 공간이 평평해지기 쉽다. 조명은 전반, 작업, 연출 세 겹을 겹쳐야 깊이가 생긴다. 이런 반외부 공간이라면 펜던트에 디머를 달아 밝기를 조절하고, 벽면 아래쪽에 낮은 간접 조명을 더해 화이트 벽돌을 은은하게 비추는 정도로도 밤 풍경이 한결 입체적이 된다. 투명 골판은 단열에 강한 재료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하다. 사계절 거실이라기보다 지붕 덮인 마당에 가까운 공간으로 쓰는 게 맞다.

옛 축사에 마련한 오토바이 정비 작업 공간
© Tim Van de Velde

Miel의 오토바이 정비소가 된 축사

축사의 쓰임은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다. 한쪽에는 소파와 러그를 깐 라운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Miel이 오토바이를 손보는 작업장이 있다. 리프트 위에 바이크를 올리고 벽 선반에 공구와 타이어를 가지런히 쌓아 둔 모습은 차고라기보다 개인 공방에 가깝다. 소를 묶어 두던 자리가 이제는 집주인의 취미를 위한 방이 된 것이다.

기름 냄새와 소음이 나는 작업을 본채와 정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뜨린 배치도 현명하다. 집 안에 취미방을 들이면 결국 생활과 뒤섞이기 마련인데, 이 집은 정원을 건너가는 몇 걸음이 ‘퇴근’과 ‘출근’의 문지방이 된다. 요즘 20~40대가 꿈꾸는 ‘내 집 안의 아지트’를 가장 설득력 있게 구현한 사례라 할 만하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과 스틸 프레임 유리창이 있는 침실
© Tim Van de Velde

오크, 스틸, 콘크리트, 재료를 줄여 얻은 고요

본채 안으로 다시 돌아오면 재료가 몇 가지 되지 않는다는 데 놀라게 된다. 오크, 스틸, 콘크리트, 흙 미장(loam), 스테인리스 스틸. 설계팀은 이 다섯 가지를 집 전체에 반복해 쓰면서 차분함을 얻었다. 침실도 마찬가지다. 노출 콘크리트 천장 아래 블랙 스틸 프레임 유리창이 계단 쪽을 향해 열려 있고, 커튼 한 겹으로 프라이버시를 조절한다.

조명은 천장에 작은 다운라이트를 박아 넣는 정도로 절제했다. 콘크리트 천장은 빛을 머금는 재료라 같은 밝기여도 어둡게 읽히기 쉬운데, 침실이라면 오히려 그 낮은 밝기가 휴식에 어울린다. 집의 디테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빛난다. 지열 난방을 들였고, 고양이를 위한 출입문을 따로 냈으며, 콘센트 하나까지 식구들의 생활 동선에 맞춰 자리를 잡았다.

저녁 조명이 켜진 헨트 주택 정원 옆 오솔길
© Tim Van de Velde

도시의 담장을 지워 버린 정원

해가 지면 정원은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본채 옆으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발치에 낮은 조명이 깔리고, 식물 아래에서 위를 향해 비추는 빛이 잎사귀를 하나하나 도드라지게 만든다. 눈높이보다 낮은 곳에 광원을 두면 눈부심 없이 길을 밝힐 수 있고, 식물을 아래에서 비추면 정원이 실제보다 깊어 보인다. 작은 마당이라도 업라이트 두세 개만 더해 보면 차이가 바로 느껴진다.

낮의 정원은 상록 덩굴식물과 관목, 나무를 층층이 겹쳐 심어 만들었다. 이웃집 벽과 담장은 덩굴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빽빽한 동네 한가운데에서 도시의 벽이 사라지는 경험, Miel과 Eline이 소 떼와 맥주잔이 오가던 이 필지를 고른 이유도 결국 이 고요였을 것이다.

ArchitectsAtelier Vens Vanbelle (Maarten Vanbelle, Dries Vens)
PhotosTim Van de Velde
Category단독주택
Country벨기에
Materials오크, 스틸, 폴리콘크리트, 흙 미장(loam), 스테인리스 스틸, 패턴 유리, 투명 골판
LocationGhent
Area217m²
Year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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