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중부의 소도시 이흘라바(Jihlava) 구시가지 끝자락에 레드 원통 하나가 내려앉았다. 톱니처럼 삐죽한 왕관을 쓴 이 건물은 5,650석 규모의 아이스하키 경기장 Horácká Arena다. 설계는 체코 브르노에 기반을 둔 Chybik + Kristof가 맡았다.
인구 5만 4천 명 도시에 들어선 경기장치고는 욕심이 크다. 지붕 위에는 누구나 공짜로 달릴 수 있는 230m 러닝 트랙이 한 바퀴 돌고, 옆에는 호텔과 식당, 체육관을 품은 실버 타워가 붙어 있다. 설계자는 이 아레나를 “이벤트 공간이기 전에 공공 건물”이라고 부른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도시가 쓰는 경기장, 그게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변두리로 쫓겨날 뻔한 아이스하키 경기장
이흘라바는 구도심 한가운데의 낡은 아이스링크를 새로 지어야 했다. 이때 시의회 다수는 경기장을 도시 외곽으로 옮기자는 쪽이었다. 넓은 땅에 큰 주차장을 깔고 경기장을 짓는, 세계 어디서나 흔히 보는 방식이다.
흐름을 바꾼 건 건축을 전공한 시의원 한 명이다. 그는 경기장을 같은 자리에 다시 짓되, 공간도 프로그램도 시민에게 더 열린 건물로 만들자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2019년 시가 공모전을 열었고, Chybik + Kristof가 여러 동으로 나뉜 투과성 높은 복합시설안으로 당선됐다.
2023년 착공해 2025년 공사를 마쳤고, 그해 말 첫 경기를 치렀다. 사업비는 22억 코루나다. 경기장 하나를 짓는 데 이 정도 돈을 쓰면서 도심에 남기기로 한 결정은, 외곽 이전보다 훨씬 까다로운 숙제를 건축가에게 넘긴 셈이다.

스칼렛 파사드 뒤에 숨긴 싼 벽
이 경기장의 첫인상은 단연 색이다. 1층은 유리 커튼월로 비워 두고, 그 위를 스칼렛 톤으로 분체도장한 타공 알루미늄 패널이 원통형으로 감싼다. 지나가는 사람은 1층 유리 너머로 땅을 파고 앉힌 아이스링크를 들여다볼 수 있다.
건축가 Michal Krištof의 설명은 솔직하다. 기능적이고 값싼 벽을 단순한 한 겹 뒤에 숨겨 건축 전체를 하나로 묶었다는 것이다. 경기장처럼 덩치 큰 건물은 설비와 구조 때문에 외벽이 누더기가 되기 쉬운데, 그 위에 스크린을 한 장 씌워 정리한 셈이다.
패널에도 계산이 있다. 외피는 층마다 하나씩, 네 개의 가로 띠로 나뉘고 위로 갈수록 패널 폭이 넓어진다. 전체 패널의 92%가 단 네 종류로 해결되고, 나머지 일곱 종류가 비스듬히 뚫린 개구부처럼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표정은 풍부한데 단가는 싸다. 공공건축이 예산 안에서 존재감을 만드는 영리한 방법이다.

고슴도치 가시와 성벽, 레드 왕관의 정체
지붕선 가까이 올라가면 삼각형 패널이 골강판 앞에 톱니처럼 솟아, 멀리서 보면 원통이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서는 착시에 가깝지만, 도시 스카이라인에 남는 실루엣은 확실하다.
이 톱니는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이흘라바 구시가지에 남은 중세 성벽의 흉벽이고, 다른 하나는 이 도시의 문장에 새겨진 고슴도치다. 이 고슴도치는 이흘라바의 옛 독일어 이름 Iglau가 고슴도치를 뜻하는 Igel과 소리가 닮은 데서 나온 상징으로 전해진다. 문장은 레드와 화이트로 이뤄져 있고, 아레나의 레드도 이 문장에서 가져온 색이다.
시의원 David Beke는 도시의 상징인 고슴도치를 떠올리게 하는 레드 파사드 덕분에 시민들이 이 아레나에 강하게 애착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스포츠 팀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색을 입혔으니, 경기장이 특정 팬들만의 건물이 아니라 모두의 랜드마크가 된 셈이다.

경기장을 도시 조직의 일부로 — 아케이드와 계단 광장
Chybik + Kristof가 가장 공을 들인 건 경기장 주변의 빈 공간이다. 대지는 언덕 위 공원과 학교 사이에 놓여 있는데, 건물을 여러 동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비워 거리에서 공원으로 바로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냈다.
경기장 지붕 일부는 거리 쪽으로 길게 내밀어 캔틸레버 아케이드를 만든다. 비를 피해 걸을 수 있는 이 처마 아래가 경기 전후 관중이 모이는 앞마당이 되고, 평소에는 그냥 동네 보행로가 된다. 그 옆에는 원형 극장처럼 층층이 앉을 수 있는 계단이 도시 쪽으로 열려 있다.
건축가 Ondřej Chybík은 이 경기장을 독립된 오브제가 아니라 도시의 연장으로 다뤘다고 설명한다. 두 공동 설립자는 공산주의 시절 체코 도시가 겪은 실패를 보며 자랐고, 도시를 더 낫게 만드는 게 건축가의 일이라고 말한다. 거대한 주차장 한가운데 홀로 선 경기장은,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풍경일 것이다.

실버 타워와 재활용한 옛 건물들
레드 아레나 곁에는 세 개의 보조동이 붙어 있다. 동쪽 모퉁이의 6층짜리 실버 큐브는 새로 지은 건물로, 1층 팬숍과 식당, 원정 선수들이 묵는 숙소,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체육관과 농구 코트가 들어 있다. 맨 위층에서 브리지를 건너면 아레나 지붕의 러닝 트랙으로 바로 이어진다.
서쪽의 두 동은 옛 경기장 시설을 살린 것이다. 하나는 연습용 링크, 다른 하나는 직원 사무실로 쓰고, 둘 다 아레나와 같은 패널 시스템으로 옷을 갈아입혔다. 다만 이쪽은 반사 마감이라, 날씨와 해의 방향에 따라 레드 아레나를 비추기도 하고 하늘의 블루 속으로 녹아들기도 한다.
레드와 실버의 대비는 한 덩어리를 주인공과 조연으로 나누는 장치다. 레드 원통이 도시의 상징을 맡고, 실버 건물들은 한 발 물러나 주변을 비춘다. 이흘라바가 13세기 은광으로 번성한 도시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실버라는 선택이 더 흥미롭게 읽힌다.

지붕 위 230m, 누구나 달릴 수 있는 옥상 러닝 트랙
아레나 지붕 가장자리를 따라 230m 러닝 트랙이 한 바퀴 돈다. 입장료도 회원권도 필요 없는 무료 시설이고, 달리다 멈추면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된다. 트랙 표면도 레드라, 위에서 보면 건물 전체가 거대한 트랙 경기장처럼 보인다.
지붕을 시민에게 내준다는 발상은 최근 공공건축에서 자주 보이는 흐름이다. 지붕 전체를 산책로와 전망대로 바꾼 노르웨이의 박물관 The Whale처럼, 건물의 가장 높은 면을 가장 공공적인 면으로 뒤집는 방식이다.
경기장은 1년에 수십 번 경기가 열리고 나머지 날은 비어 있는 건물이 되기 쉽다. 그 빈 날을 채우는 게 이런 장치다. 저녁마다 트랙을 도는 동네 사람들이 생기면, 경기장은 경기가 없는 날에도 살아 있는 건물이 된다.

콜로세움에서 이흘라바까지, 아레나라는 타이폴로지
아레나라는 말은 원래 라틴어로 모래를 뜻한다. 로마 원형경기장의 바닥에 깔던 모래에서 이름이 왔고, 타원형 무대를 계단식 관람석이 둘러싸는 형식은 콜로세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관객을 한 점으로 모으는 이 기하학은 지금의 실내 경기장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20세기 후반 들어 많은 경기장이 도시 밖으로 나갔다. 수만 명이 차를 몰고 오는 경기장은 넓은 주차장이 필요했고, 결국 교외의 거대한 박스가 됐다. 체코에서 아이스하키는 사실상 국민 스포츠이고,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금메달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그만큼 경기장은 도시마다 가장 큰 공공건물 중 하나인데, 그것이 도시와 단절되면 잃는 것도 크다.
Horácká Arena는 그 흐름을 거꾸로 돌린다. 경기장을 도심에 남기고, 형태는 로마식 원형 볼을 따르되, 바깥을 도시의 길과 광장으로 촘촘하게 엮었다. 카센터를 콜로세움처럼 지은 현대차 수원하이테크센터가 원형 경기장의 형태를 빌려 왔다면, 이 아레나는 형태보다 원형 경기장이 원래 가졌던 도시 한가운데의 자리를 되찾아 온 쪽에 가깝다.

아이스하키에서 콘서트까지, 다목적 아레나로 바꾸는 법
관람석을 이루는 타원형 볼은 레드 안료를 섞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그 위를 강철 트러스 지붕이 덮는다. 아이스하키 경기 때는 5,650석이지만, 접이식 관람석을 펼치면 7,400명 넘게 들어간다.
경기장은 아이스하키 말고도 쓸 일이 많다. 얼음 조건이 다른 피겨스케이팅 같은 동계 종목을 열 수 있고, 링크를 덮으면 배구·테니스 코트나 콘서트장, 컨퍼런스장이 된다. Krištof는 다목적으로 설계하느라 초기 투자가 더 들었지만, 시가 장기적인 가치를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런 전환은 결국 조닝의 문제다. 링크 바닥, 관람석, 설비를 어떻게 나눠 두느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경기장이 공연장으로 바뀔 수 있는지가 갈린다. 1년에 한 종목만 치르는 건물로는 인구 5만 도시가 감당하기 어렵다. 다목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인 셈이다.

관중석을 한 바퀴 두르는 순환 복도
관람석 바깥으로는 휠체어로도 막힘없이 돌 수 있는 순환 복도가 한 바퀴 이어진다. 어느 입구로 들어오든 이 링을 따라 걸으면 자기 자리와 매점, 화장실을 찾을 수 있다. 복도 한쪽은 링크를 향해 열려 있어, 걸으면서도 경기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대형 경기장에서 가장 어려운 건 관객 동선과 선수·운영 동선을 섞이지 않게 하는 일이다. 링크를 땅속으로 내려 앉힌 단면을 보면, 관객은 거리 높이에서 들어와 관람석을 내려다보며 흩어지고 링크 바닥 레벨은 경기와 운영을 위한 공간으로 분리되는 구조로 읽힌다.
안내 체계도 따로 만들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Lukáš Kijonka가 톱니 모양 파사드를 닮은 전용 서체를 개발해 사인에 썼다. 파사드의 언어가 실내 표지판까지 이어지니, 건물 전체가 하나의 브랜드처럼 읽힌다.

값싼 재료로 만든 공들인 실내
안으로 들어오면 기능적이고 값싼 재료가 그대로 보인다. 내벽은 대부분 평범한 콘크리트 블록이고, 천장에는 설비 배관이 드러나 있다. 산업적인 분위기지만 대충 만든 느낌은 아니다. 거친 관중을 견뎌야 하는 경기장에는 오히려 이런 재료가 맞다.
설계팀은 그 평범함 사이사이에 손길을 끼워 넣었다. 표면을 오목하게 눌러 무늬를 낸 맞춤형 블록, 삼각형 캐스트 유리 조명을 박아 넣은 블록을 곳곳에 섞었다. 체코 유리 공방 Bomma가 만든 이 조명은 파사드의 삼각형을 실내로 옮겨 온 것이다. 체코 유리 공예의 전통을 경기장 벽 속에 심은 셈이다.
좌석도 따로 디자인했다. 피치부터 옥스블러드까지 레드 계열의 여러 톤을 섞었고, 좌석 밑면을 각지게 접어 빈 좌석이 음향 흡음재 역할을 하게 했다. 옛 경기장의 난간은 녹여 버리지 않고 아이들이 타고 노는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다. 싼 재료로도 공들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이 아레나가 실내에서 보여주는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