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훈 ‘기찻길 옆 공부방’과 더티 리얼리즘, 지금 건축이 빼먹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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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있다. 슬레이트와 녹슨 함석 지붕이 파도처럼 겹쳐진 동네, 그 위로 회색 콘크리트 상자 하나가 어깨를 내밀고 있다. 1998년 인천 동구 만석동, 건축가 이일훈(1954~2021)이 설계한 기찻길 옆 공부방이다.

만석동은 6·25 피란민이 모여 만든 동네다. 김중미 작가가 1987년부터 아이들을 받아온 공부방이 있었고, 그 시간이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됐다. 그러니까 이 집은 유명한 건축주가 부른 집이 아니라, 동네 교사들이 사비를 모아 지은 집이다.

스물여덟 해가 지난 지금, 나는 이 작은 집이 요즘 우리 건축에 던지는 질문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빼먹고 짓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잘 지은 집이 아니라, 잘 얹힌 집

기찻길 옆 공부방은 예쁜 집이 아니다. 대지는 100m² 남짓, 3개 층을 다 합쳐도 연면적 148m²가 안 된다. 스프릿 블록과 노출콘크리트로 마감한 짙은 그레이 덩어리 위에 목재로 짠 다락이 얹혔고, 옥상에는 자갈을 깐 하늘마당과 작은 기도실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집이 주변을 대하는 태도다. 동네의 누추함을 가리지도, 흉내 내지도 않는다. 대신 주변과 비슷한 크기로 제 몸을 쪼개 앉았다. 낮은 지붕들이 만드는 잔 리듬 위에 콘크리트가 같은 보폭으로 올라섰다고 해야 할까. 재료는 완전히 다른데 스케일은 이웃과 같다. 그래서 이 집은 골목을 이기지 않는다.

2001년 이 집은 ‘올해의 비평건축상’을 받았다. 가난한 동네에 선 50평 미만의 공부방이 그해 한국 건축의 기준점이 된 셈이다.

채나눔 —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

건축가 이일훈 초상
고(故) 이일훈 건축가(1954~2021). ‘채나눔’을 평생의 설계 방법론으로 밀고 나갔다.

이일훈이 1990년대 초부터 붙들었던 설계 방법론이 채나눔이다. 집을 세는 단위 ‘채’와 ‘나눔’을 붙인 말로, 원칙은 세 가지다.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동선을 늘려 살기.

채를 나눠 흩어 앉힌 자비의 침묵 수도원 전경
경기 화성 ‘자비의 침묵’ 수도원. 기능을 한 덩어리에 몰아넣는 대신 채를 나눠 거리를 두고 흩어 앉혔다. 사진 함혜리 칼럼니스트 제공·서울신문

말장난이 아니다. 그가 설계한 ‘자비의 침묵’ 수도원에서 경당은 생활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기도하러 가려면 비 오는 날엔 비를 맞고 눈 오는 날엔 눈을 맞아야 한다. 복도 폭은 75cm,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갈 수 없어 누군가는 반드시 몸을 비켜야 한다. 편의를 깎아낸 자리에 계절과 마주침과 겸손을 집어넣는 방식이다.

두 사람이 비켜서야 지나갈 수 있는 폭 75cm 겸손의 복도
폭 75cm의 ‘겸손의 복도’. 두 사람이 마주치면 누군가는 반드시 몸을 비켜야 한다. 사진 함혜리 칼럼니스트 제공·서울신문
자연광으로 십자가 형태가 드러나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경당 내부
경당 안. 가벽 뒤 창으로 들어온 빛이 십자가를 드러낸다. 값비싼 재료 대신 빛과 방향으로 만든 장면이다. 사진 함혜리 칼럼니스트 제공·서울신문

아파트나 주상복합처럼 모든 기능을 한 덩어리에 몰아넣은 집은 편리하지만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공부방에서 그 원칙은 이렇게 번역됐다. 비 안 맞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아이가 혼자 숨어서 울 수 있는 구석이 곳곳에 있는 집. 평면을 결정한 건 심사위원이 아니라 울 데가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더티 리얼리즘은 취향이 아니라 조건이다

1990년 건축이론가 리안 르페브르(Liane Lefaivre)는 잡지 《그란타》에 ‘더티 리얼리즘’을 썼다. 레이먼드 카버 식 문학 용어를 건축으로 옮겨, 도시의 거칠고 잡스러운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재료 삼는 태도를 가리킨 말이다. 다만 이 말은 유럽에서 종종 스타일로 소비됐다. 거친 것이 멋있어서 거칠게 지은 건물들 말이다.

만석동의 더티 리얼리즘은 출발점이 다르다. 여기서 거침은 취향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돈이 없었고, 땅이 좁았고, 이웃이 너무 가까웠다. 그 세 가지를 변명이 아니라 설계의 문법으로 받아 안은 결과가 저 콘크리트 한 채다.

김광현 교수는 PHM TV 강의에서 한국 건축에서 타이폴로지가 실패한 이유를 “B급 건축을 홀대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로버트 벤투리가 라스베이거스의 간판에서 배우고, 버나드 루돕스키가 건축가 없는 건축을 들여다본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도시의 질서는 몇 채의 A급 작품이 아니라 사회가 오래 공유해 온 보통 건물의 매뉴얼에서 나온다. 그 매뉴얼을 천대한 도시는 아무리 명작을 꽂아 넣어도 중구난방이 된다.

같은 강의 시리즈에서 김광현 교수가 이일훈 건축가가 남긴 한국의 B급 건축을 따로 한 대목 잡아 이야기하는 것도 그래서다. 기찻길 옆 공부방이 값진 건 걸작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낮은 등급의 동네에서 쓸 만한 매뉴얼 하나를 실물로 만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요즘 건축이 빼먹고 있는 네 가지

지금 건축은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과장의 시대다. 실물보다 렌더링이 먼저 유명해지고, AI가 생성한 ‘존재하지 않는 건축’이 피드를 가득 채운다. 파사드는 점점 화려해지는데, 그 건물이 누구의 하루를 어떻게 바꾸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 사이에 네 가지가 빠졌다.

이웃이 빠졌다. 대지경계선 바깥을 없는 셈 치는 설계가 너무 많다. 공부방은 골목의 규칙을 먼저 읽고 제 몸집을 정했다. 조닝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이웃의 시선과 동선을 먼저 그린 셈이다.

시간이 빠졌다. 준공일이 정점인 건축은 10년 뒤 사진을 두려워한다. 때가 타면 추해지는 재료로 지어놓고 유지관리는 건축주 몫으로 미룬다. 노출콘크리트와 블록은 늙는 방식이 예측 가능한 재료다. 이일훈은 그걸 알고 썼다.

넝쿨이 벽을 덮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 하늘 성당 진입부
‘하늘 성당’ 진입부. 넝쿨이 콘크리트를 타고 오르며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보여준다. 늙는 방식까지 계산에 넣은 집이다. 사진 함혜리 칼럼니스트 제공·서울신문

예산의 정직함이 빠졌다. 공사비가 치솟은 지금이야말로 적은 돈이 설계의 조건이 되는 시대다. 돈이 없어서 못 했다는 말은, 그 조건을 설계로 풀 실력이 없었다는 말과 자주 겹친다.

사용자가 빠졌다. 상을 받으러 가는 건축과 사람이 매일 드나드는 건축은 다르다. 공모전 심사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각도와, 여덟 살 아이가 신발을 벗는 자리는 같은 곳이 아니다.

낮게, 그러나 끝까지

원도심을 통째로 밀어내는 계획과 인구가 빠져나가는 지역이 같은 날 뉴스가 되는 시대다. 이럴수록 필요한 건 랜드마크가 아니라,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 잘 얹히는 기술이다. 고쳐 쓰고, 나눠 쓰고, 작게 여러 채로 앉히는 기술. 더티 리얼리즘은 낭만이 아니라 지금 가장 현실적인 공법이다.

카메라를 든 건축가 이일훈
건축가 이일훈. 그는 평생 ‘불편하게, 밖에서, 나누며’ 사는 집을 설계했다. 사진 서해문집 제공

이일훈은 2021년 7월 2일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건축 백서의 제목은 『불편을 위하여』였다. 건축의 급수를 정하는 건 예산이 아니라 태도라는 뜻으로 읽힌다.

맨 위의 사진을 다시 본다. 저 장면의 진짜 주인공은 콘크리트가 아니다. 그 콘크리트가 끝내 밀어내지 않은, 주변의 낮은 지붕들이다. 우리가 요즘 짓는 건물들은 옆집을 그렇게 남겨두고 있는가. 기찻길 옆 공부방이 28년째 묻고 있는 질문이다.

사진 출처
기찻길 옆 공부방 외관·이일훈 건축가 인물 사진: 한겨레(강성만 기자, 자료사진)
‘자비의 침묵’ 수도원 사진 4컷: 함혜리 칼럼니스트 제공, 서울신문
카메라를 든 이일훈: 서해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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