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는 과정이 설계가 된 콘크리트 별장, Capsule Retreat

레바논이 경제 붕괴와 자재 부족으로 휘청이던 시기, 산속에 콘크리트 별장 하나가 지어졌다. 일반 시공사 없이, 건축사무소 EAST Architecture Studio가 직접 현장에서 석공과 목수들을 조율하며 하나씩 결정을 내려간 결과물이다.

이름은 Capsule Retreat. 건축주가 고향 마을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 의뢰한 이 집은, 설계도가 먼저 있고 그대로 지어진 게 아니라 짓는 과정 자체가 설계를 완성해 나간 프로젝트다. 그 과정에서 남은 흔적들이 지금도 벽과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capsule retreat aerial
© Ieva Saudargaitė

협곡 위에 낮게 앉은 콘크리트 캡슐

레바논 산악지대 자부가(Zabbougha) 마을, 지중해와 베이루트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이 집이 있다. 타원형 지붕이 지형을 따라 낮게 깔려 있어 멀리서 보면 땅 위에 얹힌 게 아니라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인다. 지붕 위에는 태양광 패널과 야외 테이블, 자쿠지까지 올라가 있어 이 집 전체가 하나의 옥상 정원이기도 하다.

capsule retreat db exterior side
© Ieva Saudargaitė

지형을 따라 흐르는 곡선 지붕

둥글게 흐르는 콘크리트 지붕은 주변 사암 지대와 산자락 마을의 풍경에서 형태를 가져왔다. 돌담과 대나무 숲을 지나야 만나는 이 지붕선은 완결된 형태이면서도 어딘가 ‘미완성’처럼 열려 있는 인상을 준다. 건축가들은 이를 형태를 강요하지 않고 땅에서 건축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도록 두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capsule retreat db exterior screen day
© Ieva Saudargaitė

지붕 위 스크린도 예술가와 함께 그렸다

이라크 출신 작가 겸 조각가 Dia Azzawi가 이 집의 몇몇 요소를 건축가들과 함께 디자인했다. 옥상 기계 설비를 가리는 조각적인 스크린이 대표적이다. 장식이 아니라 지붕 실루엣의 일부로 설계돼,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글자도 그림도 아닌 추상적인 패턴이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apsule retreat db spiral stair
© Ieva Saudargaitė

옥상으로 오르는 나선 계단

건물을 감싸듯 돌아 올라가는 나선형 옥상 계단은 이 집에서 가장 조각적인 구조물이다. 천공 메탈로 마감한 난간이 스크린과 같은 언어로 디자인돼,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예술 작업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capsule retreat construction
© Ieva Saudargaitė

설계도보다 현장이 먼저였다

이 집은 애초에 종합 시공사 없이 지어졌다. 경제 위기와 자재 수급 불안 속에서 건축가들이 직접 현장에 상주하며 장인들과 협의하고, 그때그때 조건에 맞춰 결정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시험하며, 그 지역 공예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경제적으로 따져가며 결정을 내렸다”고 건축가들은 말한다. 터파기에서 나온 돌은 부숴서 옹벽에, 거푸집으로 쓴 목재는 실내 가구와 문으로 다시 쓰였다.

capsule retreat db study model
© Ieva Saudargaitė

스터디 모형에서 시작된 캡슐

백색 스터디 모형을 보면 이 집의 매스가 얼마나 절제돼 있는지 한눈에 드러난다. 타원형 지붕과 그 아래 낮게 깔린 매스, 그리고 옥상으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까지 — 실제로 지어진 결과물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형태는 미리 정해져 있었지만, 그 형태를 실현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현장에서 결정됐다.

capsule retreat db stairwell bw
© Ieva Saudargaitė

형틀이 남긴 무늬 그대로 두다

계단실 콘크리트 벽에는 나무 거푸집의 결과 이음매, 타설 당시의 미세한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감을 매끈하게 다듬는 대신 현장에서 여러 번의 목업을 거쳐 만들어진 질감을 그대로 노출했다. 이 집에서 콘크리트는 마지막에 씌우는 마감재가 아니라, 짓는 과정 자체를 기록하는 매체에 가깝다.

capsule retreat db garden stair kitchen
© Ieva Saudargaitė

야외 주방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산의 능선

반은 실내, 반은 테라스인 야외 주방은 스테인리스 스틸 후드와 조리대로 마감해 거친 콘크리트와 대비를 이룬다. 건축가들은 스테인리스의 정밀하고 반사적인 성질이 콘크리트의 유기적인 질감과 짝을 이루도록 의도했다고 말한다. 돌계단을 몇 칸만 오르면 정원과 능선이 그대로 눈높이에 들어온다.

capsule retreat db living wide
© Ieva Saudargaitė

거실 창 너머로 이어지는 조각 정원

거실의 통유리 밖으로는 손님을 맞는 첫 조각 작품들이 놓여 있다. 건축주가 오랫동안 모아온 컬렉션이 정원 곳곳에, 그리고 실내 벽에도 자리를 잡았다. 브리프 자체가 ‘예술을 위한 공간이 있는 별장’이었던 만큼, 건축과 예술 중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뒤섞여 있다.

capsule retreat db dining wide
© Ieva Saudargaitė

이라크 작가와 함께 그린 식탁

주방 겸 다이닝 공간 벽에는 컬러가 강한 회화 두 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다이닝 테이블과 야외 피자 오븐도 Dia Azzawi가 건축가들과 함께 디자인한 결과물이다. 장식용 소품을 나중에 들여놓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건축·공예·미술이 같은 재료 언어로 설계됐다.

capsule retreat db bedroom green art
© Ieva Saudargaitė

침실까지 이어지는 아트 컬렉션

침실도 예외는 아니다. 콘크리트 벽에 짜 넣은 목재 선반 하나에 그린 톤의 추상화 한 점을 올려두는 것만으로 차가운 콘크리트 상자가 갑자기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침대맡에 놓인 모자 한 개가 이 집이 실제로 누군가 머무는 별장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capsule retreat terrace dusk
© Ieva Saudargaitė

협곡을 내려다보며 마무리하는 하루

건축가들은 이 집을 “전통적인 의미의 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고 성찰하는 ‘캡슐’ 같은 공간적 조건으로 이 집을 정의한다. 테라스에 놓인 스테인리스 화덕과 조각 작품 몇 점만으로도, 이 집이 어떤 속도로 쓰이길 바랐는지가 짐작된다.

땅 위에 얹히는 대신 지형을 따라 낮게 몸을 낮추는 방식은 하늘에서 보면 사라지는 집, Earth에서도 비슷하게 시도된 적이 있다. 형태를 과시하지 않고 땅과 타협하는 건축이 최근 산악·구릉지 별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인 셈이다.

ArchitectsEAST Architecture Studio
DesignerDia Azzawi (아티스트 협업)
PhotosIeva Saudargaitė
Category산속 별장
Country레바논
Materials노출 콘크리트, 스테인리스 스틸, 현지 석재
LocationZabbougha, Mount Leb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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