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라는 게 원래 돌고 도는 법이라지만, 바닥을 파서 거실을 만든다는 발상이 다시 인기를 끌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선큰 리빙스페이스(conversation pit)’라 불리는 이 선큰 리빙룸은 1950~60년대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 같은 요소였다. 사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전통 가옥이나 중세 스페인 저택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건축가 브루스 고프(Bruce Goff)가 1927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처음 이 개념을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본격적으로 대중의 눈에 들어온 건 1952년,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과 알렉산더 지라드(Alexander Girard)가 인디애나주 콜럼버스에 지은 밀러 하우스(Miller House)부터다. 폴 루돌프(Paul Rudolph) 같은 동시대 건축가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개념을 이어받았고, 1970년대엔 미국 중산층 가정의 거실 트렌드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지적과 함께 유행은 서서히 식었다 – 청소하기 번거롭고, 가구 배치가 자유롭지 않고, 무엇보다 시대에 뒤처진 디자인으로 여겨지면서다. 그랬던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 건축가들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화려한 색감과 현대적 소재, 실내외 경계를 허무는 구성으로 재해석되면서, 거실이라는 공간을 다시 한번 낮은 자리에서부터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가지빛 벨벳이 감싸는 거실, 캘리포니아 큐퍼티노
캘리포니아 큐퍼티노의 한 자택에는 가지색으로 물든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거실 한복판에 자리한다. 건축가 크레이그 스틸리(Craig Steely)가 설계한 이 공간의 핵심은 무려 250제곱피트(약 23제곱미터)에 달하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Patricia Urquiola) 소파라고 해야 할까 – 소파라기보다는 방 하나를 통째로 감싼 가구에 가깝다. 진한 보라빛 벨벳이 콘크리트 바닥과 대비를 이루면서 공간에 무게감을 더한다. 낮게 앉은 자리에서 올려다보는 천장은 실제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데, 이는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착시 효과이기도 하다.

실내인지 마당인지 헷갈리는 정원 거실, 퍼스 이스트 프리맨틀
호주 퍼스 이스트 프리맨틀에 닉 브런즈던(Nic Brunsdon)이 설계한 3,229제곱피트(약 300제곱미터) 규모의 주택은 거실을 아예 ‘정원실(garden room)’이라 부른다. 선큰 라운지가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당과 맞닿아 있어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흐릿하다. 소파에 앉으면 시선이 자연스레 낮아지고, 그 눈높이에서 마당의 식물들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호주 특유의 온화한 기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설계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목재 마감을 그대로 지킨 거실, 포틀랜드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자리한 이 1950년대 주택은 미드센추리 시절 지어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목재로 마감된 벽과 천장, 그 안에 파묻힌 선큰 거실이 당시의 정취를 고스란히 전한다. 리모델링을 거치면서도 원래의 선큰 구조와 목재 디테일은 손대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래된 집일수록 원형을 지키는 쪽이 더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우직함에 있는 셈이다.

차고였던 자리에 들어앉은 선큰 리빙룸, 런던
런던의 한 인필(infill) 주택은 원래 차고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폴 아처 디자인(Paul Archer Design)은 좁은 대지 조건을 오히려 활용해 거실을 지면보다 낮게 앉혔고, 덕분에 층고에 여유가 생겼다. 도심 한복판, 자투리 같은 땅에서 나온 해법치고는 꽤 과감한 선택이랄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낮아진 바닥까지 닿도록 배치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소파 밑에 와인 셀러를 숨긴 몬트리올의 집
몬트리올의 레지던스 드 리즐(Residence de l’Isle)은 선큰 리빙스페이스를 아예 붙박이 가구처럼 설계했다. 슈발리에 모랄레스(Chevalier Morales)가 맡은 이 집의 진짜 재미는 소파 뒤편에 숨어 있는데, 벽처럼 보이는 문을 열면 비밀 와인 셀러로 이어진다. 캐나다의 긴 겨울을 나는 집답게 아늑함을 최우선에 둔 구성이다. 손님을 초대해 와인 한 병을 꺼내 오는 순간, 이 거실은 단순한 응접 공간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지형을 그대로 따라 계단진 거실, 뉴욕 업스테이트 게스트하우스
뉴욕 업스테이트의 게스트하우스 스퀘어 하우스(Square House)는 데이비드 레벤(David Leven)과 스텔라 베츠(Stella Betts)가 이끄는 레벤베츠(Levenbetts)의 작업이다. 대지의 경사를 거스르지 않고 단을 낮춰가며 거실을 앉혔는데, 그 결과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마치 땅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것처럼 보인다. 손님을 위한 별채라는 점을 감안하면, 짧게 머무는 사람도 편안히 몸을 낮추고 쉴 수 있게 하려는 배려로 읽힌다. 군더더기 없는 형태가 오히려 공간의 개성을 또렷하게 만든다.

TV 대신 대화를 택한 거실, 멜버른 피츠로이 테라스
멜버른의 빅토리아풍 주택을 개조한 피츠로이 테라스(Fitzroy Terrace)는 테일러 나이츠(Taylor Knights)의 피터 나이트(Peter Knight)가 설계했다. 이 집 거실엔 TV가 없다. 대신 맞춤 제작한 소파가 낮춘 바닥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서로를 향하거나 창밖 풍경을 향한다. 명상적이라고 해야 할까 – 화면 대신 대화와 정적을 택한 드문 거실이다.

콘크리트와 파로타 나무가 맞닿은 멕시코의 거실
멕시코 발레 데 브라보에 자리한 RF 레지던스는 하비에르 산체스(Javier Sánchez)와 카를로스 마르(Carlos Mar)가 함께 설계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미니멀한 구조 안에 파로타(parota) 원목을 짜 넣어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담아냈다.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이 재료 대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산세가 보이는 창을 등지고 앉으면, 멕시코 중부의 풍경이 거실의 네 번째 벽처럼 느껴진다.

주황빛 바닥 위 아이들의 놀이터, 리마의 선큰 리빙스페이스
페루 리마의 카사 세르피엔테(Casa Serpiente, ‘뱀의 집’)는 51-1 아르키텍토스(51-1 Arquitectos)가 설계한 4,300제곱피트(약 400제곱미터) 규모의 주택이다. 이 집의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다소 예상 밖의 용도로 쓰이는데,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다. 밝은 주황색으로 칠한 바닥이 시선을 확 끌어당기고, 낮은 턱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경계가 되어준다. 어른을 위한 응접 공간이라는 선큰 리빙스페이스의 오랜 쓰임을 완전히 뒤집은 사례인 셈이다.

손으로 직접 지은 시에라네바다의 오두막 거실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 러프 앤드 레디(Rough and Ready)에 켄 메펀(Ken Meffan)이 손수 지은 오두막은 시에라네바다 산자락에 자리한다. 포장 콘크리트로 마감한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직접 짓고 다듬은 손길이 곳곳에 묻어난다. 산속 오두막이라는 조건에 맞춰 군더더기를 다 걷어낸 형태다. 이런 소박함이야말로 선큰 리빙스페이스 본연의 매력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

갤러리와 거실 사이, 뉴질랜드 캠브리지의 자택
뉴질랜드 캠브리지에 크리스토퍼 비어(Christopher Beer)가 지은 1,710제곱피트(약 160제곱미터) 규모의 자택은 거실과 개인 아트 갤러리를 한 공간에 담았다. 선큰 소파에 앉으면 벽에 걸린 작품들이 자연스레 눈높이 안으로 들어온다. 갤러리와 거실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기능이선큰 리빙스페이스라는 장치 하나로 무리 없이 묶인 것이다. 손님을 앉혀두고 작품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을 듯하다.

빅토리아풍 테라스 하우스에 감춘 시드니의 선큰 리빙스페이스
시드니 본디 정션(Bondi Junction)의 빅토리아풍 테라스 하우스는 제러미 불(Jeremy Bull, Alexander and Co.)의 손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거실을 얻었다. 목재와 가죽으로 마감한 뱅킷(banquette) 좌석이 선큰 리빙스페이스를 감싸는데, 고전적인 외관과는 사뭇 다른 현대적 인테리어가 반전 매력을 만든다. 오래된 건물의 뼈대를 지키면서 내부만 과감하게 낮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겉과 속의 온도 차가 이 집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강변을 마주한 이중 벽난로 거실, 포틀랜드 리프 하우스
포틀랜드의 리프 하우스(Wriff House)는 구겐하임 아키텍처 + 디자인 스튜디오(Guggenheim Architecture + Design Studio)가 강변 부지에 설계했다. 미니멀한 선큰 라운지 양옆으로 벽난로 두 개를 나란히 배치한 점이 특징인데, 강을 마주한 통창과 어우러지며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절제된 디자인 안에서 온기를 두 배로 늘린 셈이다. 오리건의 습한 겨울을 나기엔 더없이 알맞은 구성이다.

일본식 정취를 들인 미주리의 야외 화롯가
미주리에 자리한 커브드 하우스(Curved House)는 허프트 프로젝츠(Hufft Projects)의 매튜 허프트(Matthew Hufft)가 설계했다. 이 집의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실내가 아니라 마당에 있다. 일본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 조경 스튜디오 40노스(40North)와 함께 완성한 야외 화롯가로, 낮게 앉은 좌석이 불씨를 중심으로 둥글게 이어진다. 실내 거실의 개념을 그대로 마당으로 옮겨온 흥미로운 시도다.

수영장 물속에 잠긴 선큰 리빙스페이스, 사르디니아의 브루탈리즘 별장
이탈리아 사르디니아의 한 별장은 1970년대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페르디난도 파뇰라(Ferdinando Fagnola)와 PAT 스튜디오가 지었다. 이 집에서 가장 특이한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수영장 안에 있다. 물속 얕은 자리에 원형으로 좌석을 둘러 앉힌 구조인데, 몸을 반쯤 담근 채로 대화를 나누는 그림이 그려진다. 반세기 전 지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지금 봐도 파격적인 발상이다.

워터프론트를 향해 열린 마이애미비치의 거실
마이애미비치의 카사 이스키아(Casa Ischia)는 초에프 레비 피시먼(Choeff Levy Fischmann)이 설계한 침실 7개 규모의 워터프론트 저택이다. 거실의 선큰 리빙스페이스는 통유리 너머 수변 풍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배치됐다. 열대 기후에 맞춰 밝은 톤의 마감재를 쓰면서도, 낮게 앉은 좌석 구성 덕분에 공간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화려한 워터프론트 저택에도 이런 아늑한 구석 하나쯤은 필요한 법이다.

야외 주방까지 낮춰 앉힌 노바스코샤의 오두막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미러 포인트 코티지(Mirror Point Cottage)는 매케이라이언스 스위트애플 아키텍츠(MacKay-Lyons Sweetapple Architects)가 설계했고, 2019년 미국건축가협회(AIA) 주택상을 받은 1,700제곱피트(약 158제곱미터) 규모의 오두막이다. 이 집은 선큰 리빙스페이스를 거실이 아니라 야외 주방에 적용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조리대와 식탁 자리를 지면보다 낮춰 바람을 막고, 바다를 향한 시야는 그대로 열어뒀다. 실내 거실에서 출발한 선큰 리빙스페이스가 결국 야외 주방으로까지 뻗어나간 걸 보면, 이 오래된 아이디어의 쓰임새는 아직 다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선큰 리빙스페이스 붐에서 눈에 띄는 건, 같은 형식이 지역과 기후, 가족 구성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큐퍼티노에서는 색으로, 사르디니아에서는 물로, 노바스코샤에서는 바깥 주방으로 – 바닥을 낮춘다는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가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돌아온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매번 조금씩 다르게 진화한다는 점이 선큰 리빙스페이스의 진짜 매력일지도 모른다.


